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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이 좋아 산을 찾아 산에 마음을 두어...
종주 [縱走] /종주산행

계룡산 3사4봉 종주 (4봉3사종주)

by [대전]풀때기 2012.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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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3사4봉 종주 (4봉3사종주)

 

 

산행코스: 병사골 공원지킴터 -> 장군봉 -> 큰배재 -> 남매탑 -> 금잔디고개 -> 용문폭포 -> 갑사 -> 연천봉 -> 신원사

              -> 연천봉고개 -> 관음봉 -> 삼불봉 -> 남매탑 -> 동학사 -> 동학사 매표소 

 

산행거리: 23 km 내외

 

산행시간: 9시간 38분 ( AM 07:22 -> PM 05:00 병사골 ~ 동학사 )

산행시간: 9시간 57분 ( AM 07:22 -> PM 05:19  병사골 ~ 동학사 매표소 )

 

산행속도: 보통

산행난이도: 중상

산행날씨: 맑음

 

소요된 음료: 생수 1700ml , 포카리스웨트(분말) 1000ml , 캔콜라 1개 , 커피 1잔 

식수 공급처: 남매탑(상원암) , 갑사 , 신원사 옆 매점 , 동학사

 

참가자: 풀때기 나홀로~

회비: 0 원  

  

 

산행일정

 

병사골 공원지킴터  AM 07:22

장군봉                  AM 08:01

큰배재                  AM 09:32

남매탑고개            AM 09:37

남매탑                  AM 09:41

삼불봉고개            AM 09:55

금잔디고개            AM 10:03

신흥암                  AM 10:22

용문폭포               AM 10:34

갑사                     AM 10:43

약사여래여상         AM 11:06

원효대                  AM 11:19

연천봉고개            PM 12:05

연천봉                  PM 12:12

신원사 옆 매점       PM 01:25

신원사                  PM 01:34

고왕암                  PM 02:03

연천봉고개            PM 02:59

관음봉고개            PM 03:14

관음봉                  PM 03:21

삼불봉                  PM 04:11

삼불봉고개            PM 04:17

남매탑                  PM 04:24

동학사                  PM 05:00

동학사 매표소        PM 05:19

동학사 주차장        PM 05:31

 

 

 

계룡산 [鷄龍山]

 

차령산맥 중의 연봉으로서 충청남도 공주시·논산시와 대전광역시에 걸쳐 있는 산.

높이 845m.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차령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가다가 금강의 침식으로 허리가 잘리면서 분리되어 형성된 잔구이다. 지도상으로 대전·공주·논산을 연결하여 세모꼴을 그린다면 그 중심부에 자리 잡은 것이 계룡산이다.

이 산은 대전에서 서남쪽으로 25㎞ 지점에 있는 동학사 지구와 공주에서 동남쪽으로 19.6㎞ 지점에 있는 갑사 지구로 구분된다. 동경 12.7°7′∼12.7°19′, 북위 36°16′∼36°28′에 있으며, 총 면적은 60.98㎢인데, 공주시에 41.15㎢, 논산시에 13.01㎢, 대전광역시에 6.82㎢로 걸쳐 있다.

산 이름은 주봉인 천황봉(天皇峯, 845m)에서 연천봉(連天峯, 739m)·삼불봉(三佛峯, 775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닭 볏을 쓴 용의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계룡산은 풍수지리에서도 우리 나라 4대 명산으로 꼽힐 뿐 아니라, 관광지로도 제5위를 차지하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계룡팔경은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이 찾아든다. 삼국시대부터 큰 절이 창건되었으며, 지금도 갑사·동학사·신원사(新元寺) 등 유서 깊은 대사찰이 있다. 특히, 철당간·부도·범종, 각종 석불, ≪월인석보≫의 판목 등은 현전하는 중요한 불교 문화재이다.

또, 숙모전(肅慕殿)·삼은각(三隱閣) 등 충절들을 제사하는 사당과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오누이탑, 그리고 조선 초에 왕도를 건설하다가 중단한 신도안 등 명소가 많다.

이 산은 ≪정감록 鄭鑑錄≫에 피난지의 하나로 적혀 있는데 이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때 신도안을 중심으로 수많은 신흥종교, 또는 유사종교들이 성하였으나 지금은 정리가 되었다. 계룡산은 공주·부여를 잇는 문화 관광지로서, 유성온천과도 연결되는 대전광역시 외곽의 자연공원으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다녀간 계룡산 3사4봉 종주 지도

 

 

 

 

 

 

 

계룡산 3사4봉 종주 지도 개정판

 

계룡산 3사4봉 종주 완주 후 3사4봉 종주길 중에 보완해야 할 점이 보여 지도를 인위적으로 고쳐본다.

기존 3사4봉 종주는 연천봉 고개에서 신원사로 내려간 후 다시 왔던 길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종주의 묘미가 떨어진다.

하지만 연천봉 옆 등문암에서 보광암 이정표 방향으로 내려가면 보광암을 지나 신원사로 가는 길이 나오는데 이 길을 통해

신원사로 내려간 후 연천봉 고개로 올라가면 지나온 길을 다시 갈 필요가 없기에 종주의 의미로서 개정한 지도가

좀더 3사4봉 종주에 가깝다고 할수 있다.

 

계룡산 3사4봉 종주 등문암 -> 보광암 길을 지도에 처음으로 적용하였으니 앞으로 후답자들은 이 길로 종주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고친이: 풀때기

 

병사골 공원지킴터 맞은편에 차량주차

 

(손모양 아이콘을 누르면 대대손손 복 받으십니다 *^^*)

 

 

 

 

 

 

 

 

 

 

병사골 공원지킴터

 

산행 시작

 

AM 07:22

 

 

 

 

 

 

 

 

 

 

 

 

 

 

 

 

 

 

 

 

 

 

 

 

 

 

 

 

 

 

 

 

 

 

 

 

 

 

 

 

 

 

 

 

 

 

 

 

 

 

 

 

 

 

 

 

 

 

 

 

 

 

 

 

 

 

 

장군봉 500M

 

계룡산 3사 4봉중에 제 1봉

 

AM 08:01

 

 

 

 

 

 

 

 

 

 

 

 

 

 

 

 

 

 

 

 

 

 

 

 

 

 

 

 

 

 

 

 

 

 

 

불을 끄러가는 산불진화헬기

 

4월 17일 오후 계룡산 정상 부근에 산불이 발생해

잔불정리를 위해 출동한 산불진화헬기를 오전내내 목격하다. 

 

나중에 뉴스를 보니 임야 2헥타르가 소실되었다고 한다.

 

 

 

 

 

 

 

 

 

 

 

 

 

 

 

 

 

 

 

 

 

 

 

 

 

 

 

 

 

 

 

 

 

 

 

 

 

 

 

 

 

 

 

 

 

 

 

 

 

 

병사골 공원지킴터에서 장군봉을 지나 지석골 갈림길까지의 길은 계룡산 3사4봉 종주중에 가장 길이 험하다.

 

 

 

 

 

 

 

 

 

 

 

 

 

 

 

 

 

 

 

 

 

 

 

큰배재

 

AM 09:32

 

 

 

 

 

 

 

 

 

 

 

 

 

 

 

 

 

 

 

 

 

남매탑고개

 

AM 09:37

 

 

 

 

 

 

 

 

 

 

 

 

 

남매탑

 

AM 09:41

 

남매탑의 정식명칭은 청량사지 칠층석탑 [淸凉寺址七層石塔] 이다

 

 보물 제1284호 고려시대

 

 

남매탑의 전설

 

옛날 이 곳에 한 스님이 기도하던 작은 암자가 있었다. 하루는 한밤중에 범이 찾아와 으르렁거렸다. 스님이 자세히 보니 범의 목에 비녀가 걸려 있었다. 스님이 범의 목구멍에 손을 넣어 걸려 있는 비녀를 빼주었다. 그러자 범은 이내 사라졌다.

그 이튿날 범이 다시 나타나 스님을 등에 태우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 범이 숲 속에 스님을 내려놓는데 그 곳에는 기절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스님은 여자를 암자에 데리고 와 치료를 하였다. 깨어난 여인이, “혼인을 하루 앞두고 뒷간에 갔다가 잡혀왔다.”고 하자, 스님은, “날이 밝으면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여인은 범에게 잡혀온 자신이 죽지 않고 암자에 머물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더군다나 스님과의 인연은 부처님이 만들어준 인연인 것 같았다. 그래서 스님이 귀향할 것을 권해도 끝내 가지 않고, “스님과 함께 불도를 닦겠다.”고 결심하였다. 결국 두 사람은 오뉘의 연을 맺고 일생을 더불어 이 암자에서 수행하였다. 뒷날 사람들은 이 두 오뉘의 인연을 기려 탑을 세우고, 탑의 이름을 남매탑 또는 오뉘탑이라고 불렀다.

 

 

 

 

 

 

 

 

 

남매탑에서 휴식을 취하며 원활한 수분공급을 위해

생수에 포카리스웨트 분말가루를 섞어 마시다.

 

종주산행시 큰 도움이 된다.

 

 

 

 

 

 

 

 

 

 

 

 

 

 

 

 

 

 

 

 

삼불봉고개

 

AM 09:55

 

 

 

 

 

 

 

 

 

 

 

 

 

금잔디고개

 

AM 10:03

 

 

 

 

 

 

 

 

 

 

 

 

 

 

 

 

 

 

 

 

 

신흥암

 

AM 10:22

 

신흥암 터는 천하길지 대명당자리라고 한다.

 

 

 

 

 

 

 

 

 

 

 

 

 

 

 

 

 

 

 

 

 

 

 

 

 

 

 

 

 

 

 

 

 

 

 

 

 

 

 

 

 

 

 

 

 

 

 

 

 

 

 

 

용문폭포

 

AM 10:34

 

충청남도 공주시의 계룡면 중장리에 있는 폭포이다. 용문폭(龍門瀑)이라고 전한다. 예로부터 갑사구곡의 하나로 유명하다. 갑사구곡은 용유소, 이일천, 백룡강, 달문담, 군자대, 명월담, 계룡오암, 용문폭포 및 수정봉을 말한다. 구곡은 갑사로 오르는 계곡 일대를 지칭하는데, 추갑사(秋甲寺)라고 불릴 만큼 가을이면 단풍으로 붉게 물들고, 여름에는 우거진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용문 지명은 중국 황하(黃河) 중류에 있는 여울목으로서 이무기가 이곳을 뛰어오르면 용이 된다고 전해지는 용문(龍門)과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계룡산 연천봉 북서쪽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미륵불 위쪽 골짜기에서 폭포를 이룬다. 이 폭포는 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기 때문에 기우제나 산신제 등의 무속행사가 자주 열린다. 이 폭포가 있는 계룡면 중장리(中壯里)는 계룡산 끝자락에 자리 잡은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다. 마을 중앙에 이 폭포가 흐르고 있으며,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는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 마을로는 중장, 갑골, 갑사동 등이 있다. 중장은 대장골의 중앙에 있어 붙여진 지명이며, 갑골은 유산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갑사동은 삼거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갑사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참고자료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일러두기 및 '충청권의 지명' 총론 목차

 

출처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2010, 국토지리정보원

 

 

 

 

 

 

 

 

 

 

 

 

 

 

 

 

 

 

 

 

 

 

 

 

 

 

갑사 [甲寺]

 

계룡산 3사 4봉종주중에 제 1사

 

AM 10:43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계룡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계룡갑사(鷄龍甲寺)·갑사(岬寺)·갑사사(甲士寺)·계룡사(鷄龍寺)라고도 한다. 420년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556년(진흥왕 17)에 혜명(惠明)이 창건하였다는 설, 아도가 창건하고 혜명이 중창했다는 설 등이 있다. 또한, 503년(무령왕 4)에 천불전(千佛殿)을 신축하였다는 설도 있다.

679년(문무왕 9)에는 의상(義湘)이 중수하였고 ‘화엄대학지소(華嚴大學之所)’로 삼았으며, 이 때부터 신라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가 되었다. 그 뒤 859년과 887년에 중창하였다. 1424년(세종 6) 4월 나라에서 사원의 승려 수와 토지의 규모를 정할 때, 예조에서 ‘충청도 공주 계룡사는 원래 100결의 토지가 있었지만 이제 50결을 더해서 70명의 승려를 거주토록 할 것.’을 건의해서 결정되었다.

1583년(선조 16) 여름에는 정문루(正門樓)를 중수하였고, 1584년 여름에는 철 8,000근으로 대종(大鐘)을 주조했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모두 불타버린 뒤에 대웅전과 진해당(振海堂)을 중건하였다. 1654년(효종 5)에는 사정(思淨)·신휘(愼徽)·경환(瓊環)·일행(一行)·정화(正華)·상균(尙均)·행준(行俊) 등의 승려가 관찰사 강백년(姜栢年)의 도움을 얻어 크게 중창하였다.

같은 해 여주목사 이지천(李志賤)이 지은 계룡산 갑사사적비명을 건립하였고, 1738년(영조 14) 표충원(表忠院)을 세웠으며, 1797년에 원선사(圓禪師)가 중창하였고, 1875년에 중수를 거쳐 1899년에는 적묵당(寂默堂)을 신축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강당·대적전(大寂殿)·응향각·진해당·적묵당·팔상전·팔상문·장경각(藏經閣)·표충원·삼성각·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56호인 갑사철당간 및 지주와 보물 제257호인 갑사부도, 보물 제478호인 갑사동종, 보물 제582호인 선조 2년간 월인석보판본이 있다. 지방문화재로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5호인 강당이 있고, 대웅전은 제105호, 대적전은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안의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석조보살입상은 제51호로, 갑사사적비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15호인 영규대사묘가 있다. 표충원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2호, 삼성각은 제53호, 팔상전은 제5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5호인 갑사중사자암지삼층석탑, 제56호인 영규대사비, 제68호인 천진보탑(天眞寶塔) 등이 지정되어 있다. 또한, 강당에는 절도사 홍재의(洪在義)가 쓴 계룡갑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표충원에는 휴정(休靜)·유정(惟政)·기허(騎虛)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 중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부도는 갑사 뒤편의 산속에 있었으며, 상륜부까지 갖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오다가 1917년에 도괴된 뒤 대적전 앞으로 옮겼고, 1583년에 주조된 동종은 민족항일기에 쇠 공출로 제공되었다가 8·15광복 후 인천에서 다시 찾아온 것이다. 부속암자로 1808년에 청담(淸潭)이 세운 내원암(內院庵), 수정봉 아래의 신흥암(新興庵)·대성암(大聖庵)·대적암(大寂庵)·대자암(大慈庵) 등이 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韓國寺刹全書(權相老, 東國大學校 出版部, 1979)
忠淸南道寺刹史料集(佛敎學報 2, 1964)
韓國의 名山大刹(國際佛敎徒協議會, 1982)
名山古刹따라(李孤雲·朴雪山, 宇進觀光文化社, 1982)
文化遺蹟總覽-寺刹篇-(忠淸南道, 1990)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갑사 약수터

 

 

 

 

 

 

 

갑사동종 [甲寺銅鐘 ]

 

1584년작. 높이 131㎝, 입지름 91㎝. 보물 제478호. 조선 초기 국왕의 성수(聖壽)를 축원하는 기복도량인 갑사에 달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견부(肩部)부터 종복(鐘腹)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종복에서 하단까지는 직선으로 되어 있다.

정상에는 음통(音筒)이 없이 두 마리의 용으로 고리를 만든 다음, 종견(鐘肩)에 삼각형에 가까운 입상(立狀)의 물결 모양 무늬를 돌렸다. 상대(上帶)는 종견 밑에 하대와 비슷한 태조(太彫) 한 줄로 구획하고 원권(圓卷)내에 범자(梵字) 31자를 양주(陽鑄)하여 일렬로 배치하였다.

상대 바로 밑에 있는 4개의 유곽(乳廓)은 각각 9개의 유두(乳頭)를 그 내부에 3열로 배열하고 있다. 종신에는 4개의 당좌(撞座)와 그 당좌 사이에 석장(錫杖 : 중이 짚는 지팡이)을 쥐고 구름 위에 서 있는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이 양주되어 있고, 종의 하단에서 떨어진 위쪽에 태조 두 줄을 돌려 마련한 하대는 그 안에 보상화문(寶相華文)을 겹겹으로 양주하였으며, 하단에는 태조 한줄을 돌렸다.

유곽과 승상(僧像) 사이의 한 곳에 양주종대(陽鑄縱帶)를 마련하고, 그 위에 사분(四分)으로 양각한 명문(銘文)은 이 종의 주성내력과 주조연대, 소요된 쇠의 근량을 밝히고, 당시 주성에 필요하였던 물품의 시주자를 적어놓았다.

이 종은 기본형태와 양식에서 신라종·고려종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전반기 동종의 양식을 볼 수 있는 대표적 작품의 하나이다. 현재도 조석예불에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종신이나 용뉴(龍鈕)에 아무런 손상이 없는 완전한 형태이며 보존도 잘 되어 있다.

 

참고문헌

『朝鮮鐘』(坪井良平, 角川書店, 1974)
「조선전기범종고(朝鮮前期梵鐘考)」(정영호, 『동양학』1,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소, 1971)
「조선전기범종고(朝鮮前期梵鐘考)」(정영호, 『동양학』1,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소, 197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갑사 대웅전[甲寺 大雄殿]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5호. 정면 5칸(15.98m), 측면 3칸(9.89m)의 맞배지붕의 다포집. 높이 1.8m의 화강암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덤벙주춧돌을 놓았다.

가운데 3칸에는 띠살문의 사분합(四分閤) 쌍여닫이문이 있고 양 옆 협간(夾間)과 측면 앞 칸에 분합문(分閤門: 마루나 방에 설치한 큰 문)을 달았다. 배흘림을 준 둥근 기둥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짜고나서 그 위에 주두(柱頭)를 놓았다.

공포(栱包)는 안팎 3출목(三出目)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3칸에는 2개씩, 양 협칸에는 1개씩 배치하였다. 가구(架構)는 내고주(內高柱)를 세우고 그 위에 동자기둥[童子柱]을 얹어 마루보를 받쳤으며, 이 마루보에 의지하여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내부는 트인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았고 내고주열(內高柱列)에는 후불벽(後佛壁)을 만들고 그 위쪽에 불단을 설치하였다. 불단 위쪽에는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여 장엄하였다.

 

참고문헌

『충청남도지(忠淸南道誌)』(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 1979)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풀때기

 

 

 

 

 

 

 

이른 점심식사

 

AM 10:50

 

 

 

 

 

 

 

 

 

 

  

 

 

 

 

 

 

 

 

 

 

 

 

 

 

 

 

 

 

 

 

 

 

 

 

 

 

갑사석조약사여래입상 [甲寺石造藥師如來立像]

 

제작시기: 통이신라 말기 ~ 고려 초기

 

상높이 141㎝.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이 불상은 원래 갑사 뒷산의 중사자암(中獅子庵)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전한다.

불상은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데 소발(素髮)의 머리위에는 둥근 육계(肉髻)가 표현되었고 갸름한 존안(尊顔)의 상호는 원만하며 가늘게 뜬 두 눈과 곧게 뻗은 콧마루, 살짝 미소를 띤 입 등 이목구비의 표현도 단아하다.

대의(大衣)는 양 어깨를 덮은 통견식(通肩式)으로 입었는데 왼쪽 어깨위에 삼각형 모양으로 접힌 대의깃에 두꺼운 사선(斜線)주름이 음각되었다. 정면의 대의주름은 V자형으로 무겁게 층단을 이루며 새겨졌고 그 아래로 군의(裙衣)의 수직주름이 두껍게 조각되었다.

왼손에는 약합을 들고 오른손은 들어서 시무외인(施無畏印)을 결하고 있어 약사불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착의형식과 옷주름의 표현, 조형적인 특징에서 볼 때 천안 용화사석불입상과 아주 흡사하여 같은 계통의 조각유파에 속한다고 생각되는데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로 생각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일제말기(1943~1495년)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군수물자인 항공기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

송진을 채취한 자국

 

 

 

 

 

 

 

 

 

 

 

 

 

 

원효대

 

AM 11:19

 

 

 

 

 

 

 

 

 

 

 

 

 

 

 

 

 

 

 

 

 

 

 

 

 

 

 

 

 

연천봉고개

 

PM 12:05

 

 

 

 

 

 

 

 

 

 

 

 

 

연천봉

 

계룡산 3사4봉 종주중에 제 2봉

 

PM 12:12

 

 

 

 

 

 

 

 

 

 

 

 

 

 

 

 

 

 

 

 

 

 

 

 

 

 

 

 

 

 

 

 

 

 

 

 

 

 

 

 

 

 

 

 

 

 

 

 

 

 

 

 

 

신원사오층석탑 [ 新元寺五層石塔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신원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

높이 3.1m.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 조선시대 고종 때 건조된 중악단(中嶽壇) 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현재 4층 옥개석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오층석탑인 것 같다.

지대석을 만들고 2층기단을 형성하고 있으며, 1층 기단 면석(面石)에 2구씩으로 나누어 안상(眼象)을 조각하였으며, 상대중석에는 탱주(撑柱 : 받침기둥)와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를 모각(模刻)하였다. 탑신에는 우주가 조각되고 옥개와 탑신은 각각 별석(別石)으로 되어 있으며, 옥석받침은 3단인데 반전은 찾아볼 수 없다.

전체적으로 중후한 감을 주는 석탑으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 같다. 탑의 서쪽에 배례석이 있고 1975년 12월 해체·복원공사 당시 1층 탑신의 사리공에서 외호와 내호로 구성된 사리구(舍利具)와 함께 개원통보(開元通寶)·함원통보(咸元通寶)·황송통보(皇宋通寶) 및 파수(把手 : 손잡이)·주구(注口 : 귀때)가 깨어진 자기주전자와 녹색유리제의 목이 긴 병이 나왔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원사 옆 매점

 

PM 01:25

 

이곳에서 휴식

 

 

 

캔콜라 1개 섭취

 

 

 

 

 

 

 

 

 

 

 

 

 

 

 

신원사 [ 新元寺 ]

 

계룡산 3사4봉 종주중에 제 2사

 

PM 01:34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계룡산(鷄龍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651년(의자왕 11)에 열반종(涅槃宗)의 개산조 보덕(普德)이 창건하였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이곳을 지나다가 법당만 남아 있던 절을 중창하였고, 1298년(충렬왕 24)에는 무기(無寄)가 중건하였다. 조선 후기에 무학(無學)이 중창하면서 영원전(靈源殿)을 지었고, 1866년(고종 3)에 관찰사 심상훈(沈相薰)이 중수하면서 신원사라 하였으며, 1876년에 보연(普延)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룡산 동서남북 4대 사찰 중 남사(南寺)에 속하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향각(香閣)·영원전·대방(大方)·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八作)집이며, 내부에는 아미타불이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또 향각의 불상은 명성황후가 봉안한 것이라고 전한다.

문화재로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인 오층석탑과 부도가 있다. 오층석탑은 여래사리탑(如來舍利塔)으로 신라 말 고려 초의 양식을 띠고 있으며, 상층 일부가 없어지고 4층만 남아 있다. 1975년의 보수공사 때 1층 탑신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구(舍利具)와 함께 개원통보(開元通寶)·함원평보(咸元平寶)·황송통보(皇宋通寶)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고려시대의 것이다.

이 밖에도 대웅전에서 동쪽 약 50m 거리에는 이 절에서 관리하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호인 계룡산 중악단(中嶽壇)이 있다. 본래는 계룡산의 산신제단(山神祭壇), 즉 계룡단이었던 것이 조선 말 고종 때 묘향산에 상악단(上嶽壇), 지리산에 하악단(下嶽壇)을 두고 있었으므로 중악단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 때는 중사례(中祀禮)로 제사를 지냈고, 조선시대에는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냈으나 현재에는 향전(香奠:초상집에 부조로 내는 돈이나 물품)을 올릴 뿐이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 팔작집으로 조선 말기 건축 중 우수한 것이다. 우리 나라 산악신앙의 제단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중악단의 경역은 612㎡로 둘레에 축담을 둘렀고 전면에 이중의 내외문(內外門)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고왕암(古王庵)·등운암(騰雲庵)·마명암(馬鳴庵)·남암(南庵)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고왕암은 660년(의자왕 21)에 창건하였고, 1419년(세종 1)에 중건하였으며, 1928년 청운(淸雲)이 또다시 중건하였다. 암자의 이름을 고왕이라고 한 것은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의 장군 김유신(金庾信)과 합세하여 백제를 침공할 때 백제의 왕자 융(隆)이 피난했다가 이곳에서 신라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文化遺蹟總覽(文化財管理局, 1977)
韓國의 名山古刹(國際佛敎徒協議會, 1982)
名山古刹 따라(李孤雲·朴雪山, 신문출판사, 1986)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계룡산 중악단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신원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계룡산 산신에게 제사하던 제향 건축물.

1879년(고종 16) 중수한 건축한 건물이지만, 계룡산신에 대한 제사 공간으로서의 역사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계룡산신라의 제사 규정에서 중사(中祀)에 속한다. 신라 5악 신앙에 의한 국가적 제사의 전통이 후대로 계승된 것이다. 15세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계룡산 제사와 관련하여 신원사와 동일한 위상으로 계룡산사(鷄龍山祠)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18세기의 「계룡당기(鷄龍堂記)」라는 제사 자료와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기록으로 보아 중악단은 ‘계룡산사계룡당계룡단’의 계승인 셈이다. 중악단이 있는 신원사의 기원은 계룡산신에 대한 제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 중악단은 대문간채, 중문채, 본전이 일직선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주위는 담으로 둘러져 있다. 대문과 중문 사이에 앞마당이 있고, 본전(중악단) 앞에 중정(中庭)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중문채와 본전 사이에 돌과 벽돌을 깔아 신도(神道)를 조성하였다. 중악단의 본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평면적 46㎡)이며, 계룡산신을 모시는 제단으로서, 다포 팔작집의 화려한 공포 구성을 통해 건물의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내부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셨다.

5악, 혹은 3악으로, 한국의 대표적 산악 신앙의 대상이었던 계룡산신에 대한 고대 이래의 제사처라는 데 큰 의미가 있으며, 조선 말기 궁궐 건축에 준하는 종교 건축물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최길성 역, 『조선의 풍수』(민음사, 1990)

이필영, 「계룡산 중악단의 역사」(『계룡산산신제 복원조사보고서』, 공주민속극박물관, 1997)

이왕기, 「중악단의 건축적 고찰」(『계룡산산신제 복원조사보고서』, 공주민속극박물관, 1997)

윤용혁, 「계룡산의 문화사적 성격」(『공주, 역사문화론집』, 서경문화사, 2005)

 

 

 

 

 

 

 

 


 

 

 

 

 

 

 

 

 

 

 

 

 

 

 

 

 

 

 

 

 

 

 

 

 

 

 

 

 

 

 

 

 

고왕암[古王庵] 

 

PM 02:03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 중 하나인 신원사()의 부속 암자이다. 660년(백제 의자왕 20)에 의자왕의 명으로 창건하였다. 《공주읍지》에 따르면, 의자왕이 이 암자를 창건하도록 명하였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당시 당나라 소정방()과 신라 김유신()이 백제를 침공하였을 때, 백제의 왕자 융()이 이곳에 피난하였다가 붙잡혔기 때문이다. 암자 이름을 고왕()이라 한 것도 여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부터 조선초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419년(세종 1)에 서함(西)이 중건하고, 1928년에 청운()이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법당이 있다.

 

 

 

 

 

 

 

 

 

 

 

 

 

 

 

 

 

 

 

 

 

 

 

 

 

 

 

 

 

 

 

 

 

 

다시 돌아온 연천봉고개

 

PM 02:59

 

 

 

 

 

 

 

 

 

 

 

 

 

관음봉고개

 

PM 03:14

 

 

 

 

 

 

 

 

 

 

 

 

 

 

 

 

 

 

 

 

 

 

 

 

 

 

 

 

 

 

 

 

 

 

 

 

 

관음봉 816M

 

계룡산 3사4봉 종주중에 제 3봉

 

PM 03:21

 

 

 

 

 

 

 

 

 

 

 

 

 

 

 

 

 

 

 

 

 

 

 

 

 

 

 

 

 

 

 

 

 

 

 

 

 

 

 

  

 

 

 

 

 

 

 

 

 

 

 

 

 

 

 

 

 

 

 

 

 

 

 

 

 

 

 

 

 

 

 

 

 

 

 

 

 

 

 

 

 

 

 

 

 

 

 

 

 

 

 

 

 

 

 

 

 

 

 

 

 

 

 

 

 

 

 

 

 

 

 

 

 

 

 

삼불봉

 

계룡산 3사4봉 종주중에 제 4봉

 

PM 04:11

 

 

 

 

 

 

 

 

 

 

 

 

 

 

 

 

 

 

 

 

 

 

 

 

 

 

 

남매탑

 

PM 04:24

 

 

 

 

 

남매탑 상원암

 

 

 

 

 

 

 

상원암 약수터

 

 

 

 

 

 

 

상원암에서 커피 한잔

 

 

 

 

 

 

 

 

 

 

 

 

 

 

 

 

 

 

 

 

 

 

 

동학사 [ 東鶴寺 ]

 

계룡산 3사4봉 종주중에 마지막인 제 3사

 

PM 05:00 (산행시간 9시간 38분 소요)

 

 

 

동학사 [ 東鶴寺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鷄龍山)에 있는 절.

동계사(東鷄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724년(성덕왕 23) 상원(上願)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懷義)가 절을 창건하여 청량사(淸凉寺)라 하였고, 920년(태조 3) 도선(道詵)이 중창한 뒤 태조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丞官) 유거달(柳車達)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기 위해 동학사(東鶴祠)를 지었다. 그리고 사찰을 확장한 뒤 절 이름도 동학사(東鶴寺)로 바꾸었다.

이 절의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으므로 동학사(東鶴寺)라 하였다는 설과, 고려의 충신이자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인 정몽주(鄭夢周)를 이 절에 제향하였으므로 동학사(東學寺)라 하였다는 설이 함께 전해진다.

1394년(태조 3) 고려의 유신(遺臣) 길재(吉再)가 동학사의 승려 운선(雲禪)과 함께 단(壇)을 쌓아서 고려 태조를 비롯한 충정왕·공민왕의 초혼제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1399년(정종 1) 고려 유신 유방택(柳芳澤)이 이 절에 와서 정몽주·이색(李穡)·길재 등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다음해 이정한(李貞翰)이 공주목사로 와서 단의 이름을 삼은단(三隱壇)이라 하고, 또 전각을 지어 삼은각(三隱閣)이라 하였다.

1457년(세조 3) 김시습(金時習)이 조상치(曺尙治)·이축(李蓄)·조려(趙旅) 등과 더불어 삼은단 옆에 단을 쌓아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이어서 단종의 제단을 증설하였다. 다음 해에 세조가 동학사에 와서 제단을 살핀 뒤 단종을 비롯하여 정순왕후(定順王后)·안평대군(安平大君)·금성대군(錦城大君)·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정분(鄭奔) 등과 사육신, 그리고 세조 찬위(簒位: 임금의 자리를 빼앗음)로 원통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서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였다. 인신(印信: 도장)과 토지 등을 하사하였으며, 동학사라고 사액하고 승려와 유생이 함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1728년(영조 4) 신천영(申天永)의 난으로 이 절과 초혼각이 모두 불타 없어졌고, 1785년(정조 9) 정후겸(鄭厚謙)이 위토(位土: 묘에서 지내는 제사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경작하던 논밭)를 팔아버리자 제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1814년(순조 14) 월인(月印)이 예조에 상소하여 10여 칸의 사옥과 혼록봉장각(魂錄奉藏閣)을 세웠다. 1827년 홍희익(洪羲翼)이 인신을 봉안하는 집을 따로 지었으며, 충청좌도어사 유석(柳奭)이 300냥을 내고 정하영(鄭河永)이 제답(祭畓)을 시주하여 다시 제사를 베풀었다.

1864년(고종 1) 봄에 금강산에 있던 만화 보선(普善)이 이 절에 와서 옛 건물을 모두 헐고 건물 40칸과 초혼각 2칸을 지었는데, 초혼각은 1904년 숙모전(肅慕殿)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뒤 만화에게서 불교경론을 배운 경허(鏡虛, 1849∼1912)가 9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1871년(고종 8) 동학사에서 강의를 열었고, 1879년에는 이곳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한국의 선풍을 드날렸다.

 

6·25전쟁 때 옛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이후 서서히 중건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삼성각·동림당·조사전·숙모전·육화당·염화실·강설전·화경헌·범종각·실상선원·동학강원(東鶴講院) 등이 있다. 이 중 동학강원은 운문사의 강원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강원으로 손꼽히고 있다.

산내암자로는 관음암·길상암·문수암·미타암·귀명암·상원암 등이 있다. 이 절이 소유하고 있는 중요 문화재로는 삼성각(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7호)과 삼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8호)이 있다.

 

참고문헌

『동학사사적(東鶴寺事蹟)』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허집(鏡虛集)』(석명정, 도서출판모아, 1990)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 ·사찰편·』(충청남도, 1990)
동학사(
http://www.donghaksa.or.kr)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동학사 삼층석탑(東鶴寺 三層石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8호

 

동학사내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청량사(남매탑이 있는 곳)’라는 암자에서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1층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인데, 탑신부의 3층 몸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기단의 맨 윗돌은 탑신의 지붕돌과 같이 윗면에 비스듬한 경사를 두었다. 탑신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적당한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규모가 작은 탑으로, 통일신라 선덕왕 23년(723) 동학사를 처음 지을 때 함께 세워두었다 하나, 탑의 양식이나 다듬은 솜씨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동학사삼성각 (東鶴寺三聖閣)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7호

 

동학사 삼성각은 언제 건립했는지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각은 삼성(칠성·산신·독성)의 탱화를 모신 곳이다.
칠성은 북두칠성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맡고 있으며 산신은 우리민족 고유의 토속신으로 호랑이와 더불어 나타나며 재물을 담당한다. 독성은 홀로 깨닫고 성인이 되어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리는 존재이다. 이것은 불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도교, 토속, 불교 등 여러 신앙요소가 합쳐진 형태이다. 불교 밖의 신앙대상을 모셨으므로 건물 이름을 전이라 하지 않고 각이라 하였다.

 

 

 

 

 

 

 

 

 

 

 

 

 

 

 

 

 

 

동학사 대웅전

 

 

 

 

 

 

 

 

 

 

 

 

 

 

 

완주 인증샷~!

 

 

 

 

 

 

 

동학사 약수터

 

 

 

 

 

 

 

 

 

 

 

 

 

 

 

 

 

 

 

 

 

 

 

 

 

 

 

 

 

 

 

 

 

 

 

 

 

 

 

동학사 매표소

 

PM 05:19 (산행시간: 9시간 57분)

 

 

 

 

 

 

 

 

 

 

 

 

 

 

 

 

 

 

 

 

 

 

 

 

 

 

 

 

 

동학사 주차장

 

PM 05:31

 

차량회수를 위해 병사골 공원 지킴터로 도보 이동

 

 

 

 

 

 

 

 

 

 

 

병사골 공원 지킴터 차량회수 완료

 

PM 06:20

 

 

계룡산 3사4봉 종주 9시간대 완주~

 

산행시간: 9시간 38분 ( AM 07:22 -> PM 05:00 )

( 병사골~장군봉~갑사~연천봉~신원사~관음봉~삼불봉~동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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