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괴화산(槐花山) 201M
산행코스: 석교리 마을 -> 조망터 -> 괴화산 정상 -> 송전탑 ->장재리 방향
산행거리: ? km 내외
산행시간: 1시간 26분 (PM 03:48 -> PM 05:14)
산행 초입부분 찾아가는 주소: 충남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447
산행속도: 쉬엄쉬엄
산행난이도: 하
산행날씨: 구름많음
소요된 음료: 생수 500ml
참가자: 풀때기 나홀로~
회비: 0원
산행일정
석교리 마을 PM 03:48
조망터 PM 04:24
괴화산 정상 PM 04:35
송전탑 PM 04:57
하산완료(장재리) PM 05:14
원점회귀 PM 05:51
세종시 괴화산 201M
충청남도 연기군의 금남면 반곡리(盤谷里) · 석삼리(石三里) · 장재리(長在里) · 석교리(石橋里)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고도:201m). 이 산의 서쪽에는 금강이 흐르고 있다. 지명은 이 산에 밤에도 환하게 불이 켜있는 것처럼 보이는 괘등형(掛燈形)의 명당이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풍수지리에서는 유명한 학자나 예언자를 배출하는 명당을 '괘등형 명당'이라 한다. 산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산제가 올려지며, 지금도 이 산에 금괴가 석자 세치나 묻혀 있다는 '길재의 금단지' 전설이 전해 온다. 또한, '괴화산의 산짐승' 전설이 있다.
세종시 개발계획에 따라 괴화산 주변에는 국내외 대학과 국책연구기관,연구소가 들어선다. KAIST가 2013년 하반기에 일부 단과대학 형태로 이전할 계획이다.
일부 참고자료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일러두기 및 '충청권의 지명' 총론 목차
괴화산의 전설 -길재의 금단지-
전설 소재지: 금남면 장재리
금남면 장재리에 가면 괴화산이 있는데, 이곳은 옛날부터 명당자리로 손꼽히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옛날 백제시대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불운하게도 나․당 연합군에게 나라를 빼앗긴 백제의 한 유민이 몸종에게 무거운 짐을 들려 금강 기슭을 올라가고 있었다. 실은 웅진 기슭에 자리를 잡을까 하였으나, 사비성에 살 때 서라벌에 아는 장사꾼이 많았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길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재산을 신라에 바치면 그만이었지만, 자기가 살던 백제가 망하고 나니 그럴 수가 없어서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마침내 산을 하나 발견하고 그 아래 짐을 푼 다음, 산에서 나무를 잘라 움막을 짓고 짐을 땅속에 파묻은 다음 몸종을 곰나루에 보내었다. 그는 사비성에서도 이름난 부자였으므로 혹시나 자기에게 해로움이 있지 않을까 하고 몸종을 곰나루에 보낸 것이다. 몸종을 보내놓고 그는 나머지 종들을 불러 모아놓고는 큰 금 한 덩어리씩 나눠주면서, “지금까지 고생했으니 이제부터 자유의 몸이 되어 잘 살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종들은 좋아서 모두 입이 함박만 해졌다가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한 종이 금덩이를 땅에 놓으면서 “사람은 재물을 탐내면 도적이 되기 쉽고, 돈은 땀흘려 벌어야 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종들도 주인과 같이 살겠다며 모두 금덩이를 주인 앞에 갖다 놓는 것이었다. 주인이 만류하며 타일렀지만, 그들은 땀을 흘려서 번 금덩이가 아니라고 모두 우기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곰나루로 갔던 몸종이 헐레벌떡 들어와서는 주인을 잡으려고 현상금이 걸려 있다는 말을 전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기가 막혔다. 자기는 “죄가 있다면 돈을 모은 죄밖에 없다.”라며 무슨 결심을 했는지 몸을 빨리 일으켰다. 주인의 이 말을 들은 종 한 사람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이제부터 자기들이 주인을 보호하겠으니 여기서 숨어살라고 말했다.
그 종의 말이 떨어지자 종들은 각자 뿔뿔이 헤어져 가더니 모두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들이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는데 나․당 연합군의 군사들이 말을 타고 몇 번이나 찾아와서 그들의 주인 같은 인상을 가진 사람을 못 봤느냐고 물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인도 농부로 가장해서 그들과 함께 일했다. 돈이 딸리면 금괴를 한 쪽 잘라 사비성에 가서 팔아 보탬을 했다. 주인은 종들이 농부로서 자기를 지키며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마음껏 도와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늙어선 부자가 되어 땅을 가지고 살았다.
어느 새 주인은 늙어서 명대로 살다가 죽었다. 종들은 주인의 장례를 크게 지냈다. 그리고 장례 날 한 몸종이 “주인의 재산은 주인의 너그러운 마음씨대로 곱게 쓰여져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 이제는 우리들에게 금괴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 같으니 아주 주인의 무덤 곁에다 남은 금괴를 묻어 버리자.”라고 말하자, 모두 찬성해서 그 날로 금괴는 주인 무덤 곁에 묻혔고, 또한 종들은 죽을 때도 자식들에게 금괴 이야기를 한 사람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주인의 금괴가 이 산에 묻히자, 어쩐 일인지 이 산은 밤에도 빛을 낸다고 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금남면 장재리 ‘길재’에 있는 이 산은 밤에도 환하게 보인다 하여 ‘괴화산’이라 불렀다 한다.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이 산에 금괴가 석 자 세 치나 묻혀 있다 한다.
출처
연기실록, 금남면지
괴화산의 전설 -청송모랭이 금전굴-
전설 소재지: 금남면 장재리
금남면 장재리 괴화산 기슭에 ‘금전굴’이라는 굴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에 괴화산 밑의 동네에 마음씨 착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어찌나 욕심이 없던지 자신의 재산을 남에게 다 나눠주고 혼자서 근근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금산리의 괴화산 기슭에 멍석만한 금덩이가 묻혀있다는 전설을 듣고 금을 캐는 사람들이 마을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금을 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그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금으로 된 동자가 나타나서 금을 캘 수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꿈이 하도 이상하여 그는 금 동자가 일러준 곳을 가보았다. 아름드리 나무들만 들어차 있었다. 그때 금을 캐겠다고 한 젊은이가 마을에 들어왔다. 젊은이는 허름한 옷차림에 눈초리가 빛났다. 오로지 금을 캐기 위해 사는 사람 같았다. 그는 젊은이가 하도 금이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조르는 통에 금 동자가 알려준 곳을 말해버렸다. 젊은이는 그 길로 그곳을 찾아가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땅을 계속 파고 들어가도 금덩이는 나오지 않았다. 젊은이는 땅을 파고 파다 금 캐는 일을 단념하고 돌아갔다. 젊은이가 돌아가고 얼마쯤 있다 그가 젊은이가 파내려 간 그 굴로 들어가 땅을 조금 파헤치자 커다란 금덩이가 나왔다.
그 후로 사람들은 그 굴을 ‘청승모랭이 금전굴’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착한 사람이 그 굴에 들어가 땅을 파면 금이 나온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출처
연기군사이버홍보관
괴화산의 전설 -괴화산의 산짐승-
전설 소재지: 금남면 석교리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 뒷산을 괴화산이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아주 먼 옛날 오랑캐들이 쳐들어왔다. 오랑캐들은 닥치는 대로 불지르고 약탈하는가 하면, 부녀자들을 잡아가고 어린아이와 노인들까지 잡아가는 잔인함을 보였다.
오랑캐들은 금강을 타고 올라오다 이곳 괴화산에 진을 쳤다. 그때 강 건너 전월산에서는 우리나라 병사들이 진을 치고 전투를 벌였다.
괴화산 밑에 사는 주민들은 오랑캐가 쳐들어와 꼼짝달싹 못하고 제각기 다락이나 깊숙한 곳에 숨어서 동태를 살피었다.
어떤 이들은 마을을 떠나는 이도 있었고, 주민들의 불안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산 위에 진을 치고 있던 오랑캐들은 총공격을 하기 위해 무기를 점검하고 날이 밝으면 강 건너에 화살을 쏘면서 강을 건너는 작전을 구사하기로 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 오랑캐들은 깜짝 놀랐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성했던 화살과 무기들을 괴화산 짐승들이 쪼아서 모두 못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 무기가 없는 오랑캐들은 꼼짝달싹 하지 못했다.
그때 아군이 화살을 비 오듯 쏘니, 적군은 모두 사살 당하고 불과 몇 명만이 살아서 도망쳤다. 동네 사람들은 아군이 승리하자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승리를 축하했으며, 누군가 “우리 괴화산 짐승들이 아니었으면, 이번 승리도 없었을 것이니 보답을 하여야 해.”라고 하자 모두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음식을 장만하여 마을 주민이 절을 한 다음 산 곳곳에 뿌려 놓았다.
그때부터 괴화산 아래 석교리, 반곡리, 석삼리, 길제, 봉기 등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1일을 기해 비린 음식을 먹지 않고 살생을 하지 않으며, 괴화산에 올라 산제를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연기대첩연구
괴화산의 전설 -딸에게 빼앗긴 명당-
전설 소재지: 금남면 장재리
금남면 장재리를 둘러싼 명산에 명당이 여러 곳 있는데 그 중의 한 명당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장재리 근방에 모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집안이 넉넉한데도 딸을 가난한 집으로 혼수도 시원찮게 해서 시집을 보냈다. 모씨는 효성보다도 자기와 자손이 더 좀 잘 살려고 아버지의 묘 자리를 구하기로 했다. 지관을 데리고 근방의 산을 헤매다가 명당자리를 발견하고 많은 돈으로 그 자리를 사들였다. 이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서 딸까지도 알게 되었다. 딸은 쏜살같이 친정에 와서 축하를 하고, 여자답지 않게 그 묘 자리를 둘러보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모씨의 부친이 돌아가 장례를 모시게 되었다. 모씨 상가에서는 동네 일꾼을 시켜 자랑스럽게 명당자리에 산역을 시작하였다. 그 딸이 조부상을 당하여 친정에 와서는 발성을 하고 동네 부녀들이 바쁘게 일손을 놀리는 틈을 타서 독하고 맛있는 술을 한 동이 이고 산역하는 일꾼에게 먹이러 올라갔다. 수고한다는 위로와 함께 일꾼들에게 술을 퍼 먹여 취하여 잠들게 하고는 도랑에 가서 물 한 바가지를 퍼다가 관 중앙에다 부어 놓고는 얼른 내려왔다. 하관시가 되어 상여가 올라오고 잠에서 깨어난 일꾼들이 묘 자리에 들어가 시신을 모시려 하니, 그 안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것이었다. 상주 모씨와 모든 사람이 놀라고 실망하여 물이 나는 자리가 명당이냐고 그 자리를 메우고 다른 곳을 찾아 안장하고 내려왔다. 그리고는 그 지관만을 책망하고 추궁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에 그 딸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딸이 친정에 와서 시아버지의 묘 자리 하나를 빌려 달라고 했다. 모씨가 그만한 자리가 어디 있느냐고 대답하니 딸이 지난번 할아버지 묘 자리에 물이 났지만 그곳이라도 좋다고 졸라댔다. 모씨는 바로 그 자리라면 좋다고 허락을 했다. 그 딸은 부리나케 돌아가 시아버지 시신을 그 자리에 안장했다. 딸의 악착같은 연극이 성공한 것이다.
그 후로 모씨 집안은 자식들이 시원찮아지고 가산이 기울어 갔고, 그 딸네는 자식을 잘 두고 가산이 점점 늘어갔다. 따지고 보니, 모씨네 가산이 거의 모두 딸네 집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 딸이 친정 집의 명당을 빼앗아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로부터 딸은 ‘예쁜 도둑놈’이라는 말이 생겼다 한다.
참고문헌
금남면지
괴화산의 전설 -개구리형 무덤-
전설 소재지: 금남면 장재리
금남면 장재리 아랫동네에서 윗동네로 올라가는 길의 나지막한 밭 옆에 작은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을 ‘개구리형 무덤’이라 하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에 유명한 지관이 이곳을 지나는데 하필이면 노자 돈도 떨어지고 허기져 죽을 판이었다. 그는 염치 불구하고 밭에서 일을 하다 참을 먹고 있는 농부에게 다가가 함께 먹자고 했다. 농부는 밥이 적었지만 기꺼이 먹던 밥을 내주었다. 밥을 먹고 기운을 차린 지관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궁리를 하다 농부의 아버지 묘 자리를 잡아주었다. 그런데 농부가 보니 그곳은 물이 흥건한 논이었다. 지관은 이곳에 아버지의 묘를 쓰고 이 동네에서 멀리 이사를 가서 살되 자손들은 그 묘에 성묘나 벌초를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치산, 제사를 지내게 하면 삼 년 안에 부자가 되고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고 말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 농부는 곰곰이 생각하다 아무래도 지관이 거짓을 할 리가 없어 지관의 말을 믿고 아버지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을 했다. 가족과 친지, 문중에서 모두 반대하는 바람에 그는 혼자서 밤에 그곳에 아버지의 묘를 조그맣게 쓰고 이튿날 가족들을 데리고 멀리 이사를 갔다. 그러자 삼 년이 지나면서부터 농부는 부자가 되었고, 자손도 날로 번창해갔다. 농부가 하도 신기하여 용한 지관을 데리고 가서 그 묘를 자세히 살펴보니, 지관이 이곳은 개구리형 물 명당인데 여기에 선친을 모시고 개구리처럼 묘를 써서 가문이 번창했다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 그 농부는 나이가 많아 운명하게 되었다. 농부는 자식들을 불러놓고 아버지의 묘를 잘 써서 가문이 번창했으나 그 묘는 개구리가 제 새끼를 잡아먹는 형이니 절대로 그 묘에 직접 가지 말고 남을 시켜서 치산하고 제사를 지내고, 묘를 크게도 작게도 하지 말고 그대로 개구리모양으로 두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을 했다. 그 농부가 죽은 후로도 자손이 번창하고 재물을 많이 모았으나 그의 유언대로 그 묘에는 자손들이 직접 오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금남면지
다녀간 세종시 괴화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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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전체 지도
세종특별자치시에 건설되고 있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지역은 주산인 원수산과 함께 전월산과 괴화산 이라는 명산이 있어 삼산(三山)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수(二水)가 되는 동쪽의 금강과 북쪽에서 흘러내린 미호천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뛰어난 자연풍치를 보여주고 있다.
석교리 마을 입구
옛날에 돌로 놓은 다리가 있다하여 돌다리라 하였는데 한자표기로 석교리라 하였다
이 마을에는 청송심씨와 전주이씨가 주로 사는데 전주이씨가 마을주민의 70%를 차지한다.
석교리 마을 특이점: 고인돌 2기 있음
석교리 마을 주차
PM 03:48
석교리 마을 탑제
탑제는 마을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을의 재앙과 액됨을 제거하고, 복을 부르던 민간신앙이다. 또한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조성되었던 서민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석교리 마을에서 바라본 괴화산
산길 진입
PM 03:57
괴화산 중턱 조망터
(석교리 마을 방향)
PM 04:24
괴화산은 등산로 개발이 전혀 되지 않아 산길 곳곳에 쓰러진 나무가 많다.
괴화산 정상 201M
PM 04:35
괴화산 정상에서는 수풀로 인해 조망이 없다.
하산
송전탑
PM 04:57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로 괴화산 곳곳에 있는 분묘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장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무연고 분묘는 강제이장)
괴화산 장재리 방향에 분묘가 제법 많은거 같은데 재미있는건 장재리에 있는 땅이 옛날부터 명당자리로 소문났는지
장재리 땅에 관련된 전설이 본인이 파악한 바로는 7가지나 된다.
길재의 금단지 전설
청송모랭이 금전굴 전설
딸에게 빼앗긴 명당 전설
개구리형 무덤 전설
부처샘 전설
장절터 전설
들판의 버드나무 전설
장재리 방향 괴화산 끝 능선에서 바라본 세종특별자치시 중심지 방향 조망
하산완료
05:14
차량회수를 위해 도로를 따라 원점회귀 도중 시간을 단축하고자 괴화산 능선을 넘는도중 발견한
괴화산 벌목현장
원점회귀 완료
PM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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