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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경기도의 산

남한산성 -병자호란 47일간 항전의 현장-

by [대전]풀때기 2013.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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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병자호란 47일간 항전의 현장-  

 

날짜: 2013년 10월 3일(목)

 

산행코스: 남한산성 안내소 -> 침괘정 -> 남한산성 성벽 -> 수어장대 -> 우익문(수문) -> 전망대 -> 국청사

              -> 국청사 약수터 -> 북문 -> 남한산성 안내소

 

산행시간: 1시간 43분 (AM 03:10 -> PM 04:53)

산행거리: 5 km 내외

 

 

참가자: 풀때기 , 풀때기+1

 

 

차량주차 장소: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591-7

 

산행속도: 쉬엄쉬엄 천천히

산행난이도: 하

산행날씨: 구름 조금

 

 

산행일정

 

남한산성 안내소        PM 03:10

침괘정                     PM 03:15

아래어정 약수터        PM 03:30

남한산성 성벽           PM 03:44

수어장대                  PM 03:49

우익문(수문)             PM 04:09

전망대                     PM 04:15

국청사                     PM 04:20

국청사 약수터           PM 04:31

북문                        PM 04:46

남한산성 안내소        PM 04:53 

 

 

남한산성

 

둘레 약 8,000m. 사적 제57호. 지정면적 52만 8460㎡.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시설과 관해(官廨 : 관청),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란하였는데, 이 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

(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禛)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과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따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壇)으로 나가 치욕적인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보수현황을 보면 1964·1965년에 동문, 1966년에 연무관과 현절사,

1967년에 지수당과 영월정, 1969년에 남문, 1972년에 연무대와 이서사당·영월정, 1973년에 번와단청(飜瓦丹靑),

1974년에 연못과 성곽 부분이 각각 보수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문은 여장을 두르고 초루(譙樓 : 성 위에 세운 누각)를 올려 세워 규모가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남한산성 전체 지도

 

 

 

 

 

 

 

스마트폰용 GPS 어플 나들이로 기록한 자료

 

 

 

 

 

 

 

남한산성은 과거 수도를 방어하고 한강이남 주요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 쌓은 천혜의 요새로 알려져 있지만

병자호란 47일간 항전의 현장이자 치욕의 장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0월 3일 개천절을 맞이하여 풀때기+1 과 함께 병자호란 47일간 항전의 현장인 이곳 남한산성을 산책하기로 한다.

 

남한산성 안내소 부근에서 산행 시작

PM 03:10

 

등산로 길이 매우 좋다.

 

 

 

 

 

 

 

침괘정

 

PM 03:15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다시 지은 후에 침괘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백제 온조왕의 궁궐터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며, 침괘정의 오른쪽에는 무기를 보관하던

무기고나 무기를 만들던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앞면 7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안쪽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고,

현 건물구조로 볼 때 근처에 있었던 무기고나 무기제작소의 집무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문화재청

 

수어장대 방향으로 진행

 

 

 

 

 

 

 

 

 

 

 

 

 

 

 

아래어정 약수터

 

PM 03:30

 

음용 부적합 판정이다.

 

 

 

남한산성 성벽 도착

 

PM 03:44

 

 

 

 

 

수어장대 방향으로 오름

 

 

 

 

 

 

 

 

 

 

 

 

 

 

 

 

 

 

 

 

 

 

 

 

 

 

 

 

 

 

 

 

 

 

 

 

 

 

 

수어장대(守禦將臺)

 

PM 03:49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이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

(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2층 4면의 바깥기둥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인조 2년(1624)에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출처]

문화재청

 

 

 

 

 

 

 

 

 

리대통령각하 행차 기념식수

 

수어장대 옆에는 리대통령각하 행차 기념식수 비석이 있다.

1953년 9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산성을 방문해 기념식수한 사실을 이 곳 책임자 누군가가 비석으로 세운 것이다.

국어의 두음법칙(頭音法則)을 어겨가면서까지 이(李)를 ‘리’로 부르고 나무 하나

심은 것까지 비석을 세운 그 시대 아랫것들의 행태(行態)가 꼴사납다.

 

[출처]

인터넷 발췌

 

 

 

 

 

 

 

 

 

리대통령각하 행차 기념식수 비석 맞은편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守禦將臺’라는 각자(刻字)가 우람하다.

이 바위는 ‘매바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아픈 전설이 담겨 있다. 남한산성 축성 때 동남쪽 부분은 이회 장군이,

서북쪽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각성(覺性)스님과 응성(應聖)스님이 책임을 지고 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회 장군이 맡은 구역은 제 날짜에 축성이 이루어지지도 않고 비용도 부족해 공사진척이 지지부진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안 장군의 부인 송씨와 첩실 유씨는 호남으로 모금활동을 떠나 공사비를 모아 돌아왔다.

그러나 장군은 공사비를 횡령하였다는 억울한 누명으로 이미 참수(斬首) 당한 뒤였다.

장군이 참수를 당하는 순간 수어장대 앞 바위에서는 매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한다.

장군의 억울한 사정을 바위는 알았는지 매를 날려 그 충절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 후 이 바위는 매바위라는

이름을 얻게 되어 이회 장군의 억울함을 전하고 있다.

그러면 송씨 부인과 유씨 부인은 어찌되었을까. 모금해온 쌀을 모두 송파강에 던지고 물로 뛰어 들어 자결했다 한다.

쌀을 던진 곳 송파나루 앞은 쌀섬여울이라 불리게 됐고 이들이 자결한 한강과 탄천이 만나는 위치 옆 무동도(舞童島)

근처에서는 궂은 날이면 여인네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다. 이들의 넋을 위로하려고 잠실동 313-1번지 부근에

부군당(府君堂, 호구부인당, 애기씨당)을 세웠는데 1971년 잠실이 개발되면서 이제는 이야기로만 남았다.

 

[출처]
인터넷 발췌

 

수어장대를 관람 후 우익문(수문) 방향으로 진행

 

 

 

 

 

 

 

 

 

 

 

 

 

 

 

성벽을 따라 걷는 길이 제법 묘미가 있다.

 

 

 

 

 

 

 

 

 

 

 

 

 

 

 

 

 

 

 

 

 

 

 

 

 

 

 

 

 

 

 

 

 

 

 

 

 

 

 

우믹문(수문)

 

PM 04:09

 

남한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정조 3년(1799)에 개축하여 우익문(右翼門)이라 부른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함께 청나라 진영으로 들어가 항복할 때 이 문을 통과했다고 한다. 서쪽 경사면이 가파르기 때문에 물자를 이송하기는 힘들지만 서울 광나루와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성문은 반원형 홍예문이며 높이 2.5m·폭 2.1m로 작고 좁다. 문 안쪽에는 2짝의 목재 판문이 있다. 정면 3칸·측면 1칸의 문루는 겹처마의 팔작지붕 양식이다.

 

[출처]

문화재청

 

 

 

 

 

 

 

 

 

 

 

 

 

 

 

 

 

 

 

 

 

 

 

 

 

 

 

 

 

 

 

 

 

 

 

 

 

 

 

 

전망대

 

PM 04:15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조망

 

 

 

 

 

 

 

 

 

 

 

 

 

 

 

 

 

 

 

 

 

 

 

 

 

 

 

 

 

 

 

 

 

 

 

 

 

 

 

하산

 

 

 

 

 

 

 

국청사

 

PM 04:20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의 말사(末寺)이다. 1624년(인조 2)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창건하였다

구한말에는 의병의 무기창고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비밀이 누설되어 일제에 의해 폭파되고 말았다.

그 뒤 오랫동안 절터만 남아 있다가 1968년 보운(普運)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으며, 유물로는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친필이 적힌 병풍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친필로 된 책자 3권이 전한다.

 

[출처]

인터넷 발췌

 

 

 

 

 

 

 

 

 

국청사 약수터

 

PM 04:31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서 금닭이 홰를 치며 울었다고 한다. 또 이 약수로 아버지의 종기를 고쳤다는 효자에 관한 이야기도 전한다.

 

이곳도 아래어정 약수터와 마찬가지로 음용 부적합 판정을 받은 상태다.

 

 

 

 

 

 

 

 

 

 

 

 

 

 

 

 

 

 

 

 

 

 

 

 

 

북문(전승문)

 

PM 04:46

 

남한산성 북쪽 해발 365m 지점에 있는 북문으로 남한산성의 북문을 '전승문(全勝門)'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다시는 전쟁에서 패하지 말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병자호란 당시 적과 대치를 하고 있던 남한산성 내의 300명 군사들은 영의정이던 김류의 주장에 따라 북문을 나서

적에게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성문을 나선 병사들은 적의 계략에 말려들어 변변한 전투 한 번을 못해보고 몰살하고 말았다.

이는 '법화골 전투'라고 한다. 이 북문을 나선 병사들이 법화골에서 패전한 전투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로 기록돼 있다.

 

 

 

 

 

 

 

 

 

 

남한산성 안내소 도착

산행 종료

 

PM 04:53

 

이곳 남한산성에서는 2013.10.18(금) ~ 2013.10.20(일) 3일간 제 18회 광주남한산성문화제가 열린다고 한다.

이때 이곳을 방문하면 풍성한 볼거리를 볼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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