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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공감

[스크랩] 우리나라 성씨와 족보는 모두 가짜다

by [대전]풀때기 2009.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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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씨와 족보는 최초에 이민족 생존과 정치적 목적

       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전부 가짜이다.

 

 

우리나라 족보는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친 신라 김춘추왕때 최초로 만들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법홍왕때에

완성되어 최초로 문헌으로 남게 되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씨의 유래나 족보가 거의 전부 허위 사실이나 가짜로 만들어지고 뒤바뀌어 만들어 졌습니다.
즉,   최초에 족보와 성씨를 글로 남겨 놓을때 우리나라 거의 모든 성씨와 족보가 2000여년 전 가야, 신라의 기원과 함께

생긴 것으로 되어 있고  경상도가 성씨의 본관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다시 설명하자면 우리나라에서 성씨의 유래와 계보를 나타내던 족보가 최초로 만들어진 당시에는

우리나라 성씨 거의 대부분의 뿌리(=본관)가 경상도 지역인 것처럼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단군동이족의 뿌리를 완전히 바꾸어 놓고 뿌리를 뽑아 버리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렇게 성씨와 족보 각색작업이 완성되어  성씨와 족보가 뒤바뀌고 가짜로 만들어져서 우리나라 성씨의 본관이

경상도 지역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족보를 최초로 만들던 신라시대에는 거의 100%에 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성씨의 본관이 타 지역이 생기고(같은 성씨에서 본관만 바뀐 경우도 있음) 
고려, 조선시대에 중국에서 넘어온 성씨가 있고 또 신라정권에서 단군동이족 멸족정책에 의해 고구려, 백제의 단군의 후손들이

노예로 전락하여 성씨 없이 신나시대에 살다가 고려 말,조선시대에 성씨를 갖기 시작하면서 성씨와 족보를 만든 경우도

상당히 많아 3개의 성씨가 한민족의 50% 정도를 점하는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중에 이씨 성이야 세계 최초로 문자의 형식으로 8,000여년 전에 기록된 성씨이니까 이씨 성을 가진 인구가 많은 것은

당연 합니다만--------
한마디로 전부 가짜라는 겁니다.

 

이런 변천 과정을 통해 현재는 우리나라 전체 200여 가지(2005년 조사) 성씨 중에서 60%~70% 정도가 경상도 지역이

성씨의 뿌리(=본관)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국이 중화족의 시조로 삼는 헌원이 동이족 단군환웅의 14대 후손인

치우천황(2002년 붉은악마의 마스코트로 중국의 역사 학자들과 지식인들이 이걸 보고 경악했다는 사실)에 의해

복속 되었다는 기록이 단군 동이족의 문자인 상형문자(=현재 중국 한문의 뿌리)와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는

역사서가 중국에 있습니다.

 

(이 기록은 지금부터 약4,700 여 년 전의 역사적 사실----이 기록은 2,100여년 전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하여 중국역사를

뒤바꾸어 놓을때  사마천에 의해  일부 왜곡되고 각색되어 바뀐 중국역사서도 있음. 그러나 지금도 세계최초의 문화인

중국의 홍산문화가 동이족이 세운 문명이라는 사실 등등이 중국과 일본의 역사책에는 무수히 많음. 오히려 신라때

단군동이족의 역사를 말살하여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거의 없음)

 

또 중국의 고대국가인 은나라(= 상나라)가 동이족의 나라라는 4,700여년 전의 역사 기록이 중국 역사서에 있는 것으로 볼때
한민족은 신라의 기원인 2,000 여년 전에 생긴 민족이 아니고 4,700여년 전부터 존재한 민족이고 단군,동이족인 한국사람들의

성씨와  그 뿌리(=본관)는 2,000 여년 전의 경상도 지역이 아닌 중국과 한반도 전역이라는 겁니다.


우리 단군동이족인 한민족의 성씨와 뿌리(=본관)는 4,700백여년 이전에 그 뿌리가 있기 때문에 2,000여년 전에

시작된 신라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음은 100% 명약관화 합니다. 

 

이런 사실로 볼때 중국과 한국의 대부분의 성씨는 4,700여년 전부터 존재했고 (일부 성씨들은 그 이후에 생긴 성씨도 있음)
그 뿌리가 단군동이족에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겁니다.

즉 다시 말해 중국이나 한국 성씨 대부분이 4,700 여년 전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단군 동이족의 성씨라는 겁니다.

 

신라의 시조가 누구라는 것은 아직도 실체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는 역사에 근거가 남아 있습니다.

허나, 신라는....

지금 경주 김씨 족보에는 김알지가 시조입니다.

 

" 대보공 김알지" (金閼智, 65년 ~ ?)는 신라 시대의 인물이다.  경주 김씨의 시조이다.

 

65년 봄 음력 3월에 탈해 이사금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아뢰자,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 보았더니 조그만 사내아기가

그 속에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탈해 이사금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서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알지(閼智)라 이름하고 금궤짝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이라 하였다. (위키백과)

 

이것이 우리가 국사시간에 배운 신라시대 시조 김알지는 알에서 태어나 신라를 건국했다?

사실, 이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아니 무슨,  조류도 아니고 파충류도 아닌 포유류의 일종인 인간이 알에서 태어나다니?

이것을 버젓이 교과서에 올려 후손에게 가르친 인간들이나....

 

그러나 다행인것이 최근 KBS에서 방영 된 역사추적에 신라시조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방송에 신라시조는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였다는 근거를 신라의 태종 문무왕의 비석에서 찿아냈습니다.

한국사가 뒤집어 질 일이 생긴 것이지요.

 

1. 15대조 성한왕(星漢王), 그리고 투후(?侯)의 의미?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태조는 박혁거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문무왕릉 비문에는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한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비 역시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베일에 싸인 인물 성한왕. 그리고 문무왕릉 비문에 등장하는 또 다른 글자 <투후>와 <15대조 성한왕>은 비문의 주인공 문무왕의 조상에 대한 계보인가?
▲문무왕릉비 조각에 새겨진 의문의 글자‘투후’


2.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문무왕릉 비문에 기록된 ‘투후’. 한서에 의하면 투후는 한나라에 포로로 잡힌 흉노족의 태자 김일제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문무왕과 같은 김씨였다. 그는 한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되었고 한무제에 의해 투후로 임명되었던 실존 인물로 밝혀졌다.
▲김일제 묘


3. 비문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들.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전7엽> <투후><전7엽><15대조 성한왕>등 암호 같은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바로 문무왕의 15대조인 성한왕과 흉노왕의 태자였던 투후 김일제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암호들이다.
▲문무왕릉비문의 탁본
▲중국 무위시 김일제 석상


4. 김알지는 정말 금궤에서 태어났을까?

계림의 금궤 짝에서 돌연 등장하는 신라 김씨 시조 김알지. 정말 신라 김씨는 흉노족일까? 초기 신라 무덤과 흉노족 무덤은 모두 적석 목곽분이라는 동일 양식이고 동일한 오르도스형 흉노 동복(솥)이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됐다.

 


비문 속 주인공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은 어떤 관계인가?
투후 김일제의 나라 투국은 과연 존재했는가?
흉노족은 정말 한반도 남단으로 내려왔는가?
과연 수수께끼 같은 문무왕 비문의 비밀은 풀릴 것인가?

▲국립경주박물관의 문무왕릉비 하단석


5.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은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성한왕은 누구인가?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제천지윤 전7엽’이라는 암호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여기서 ‘투후제천지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자손이라는 뜻. 그리고 ‘7엽’은 일곱 개의 잎사귀, 즉 7대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 7대를 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15대조 성한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 7대를 전하여 신라의 성한왕으로 이어졌다는 말일까? 그리고 과연 성한왕은 누구인가?
▲대능원


6. 흉노족 문화와 신라 문화의 유사성.
신라의 문화와 풍습은 북방기마민족 흉노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금은의 나라’로 표현되어 있다. 황금 숭배는 유목 민족의 특징이다. 또 신라 김씨 무덤과 흉노족 무덤양식은 적석목곽분으로 동일하다. 흉노의 근거지에서 발견된 ‘동복(청동 솥)’ 역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다.
▲기마인물형 토기
▲동복


7. 투후 김일제의 나라 투국은 존재했는가?
중국에서 김(金)씨는 흉노계를 상징하는 성씨와 같다. 중국의 김씨는 대부분 투후 김일제를 시조로 모시는 흉노족.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 입구에는 이곳이 김일제의 투국이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투국성 유적지에는 김일제를 기리던 투후사가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 주민들은 투국성을 김성(金成), 금성이라고 한다. 조림사업이 시작되면서 숲으로 바뀐 이 일대 지하에 투후국의 흉노족이 ‘금성’이라 부르던 성이 있었다. 김일제의 성을 딴 투후국의 ‘금성’과 신라의 수도 ‘금성’ 두 이름이 일치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산동성 하택시 투국의 옛성


8. 신라는 이주민이 세운 나라,
 그렇다면 흉노족과 관련이 있다는 걸까?
왕망의 신나라에서 사용되던 ‘화천’이 출토된다. 이것이 발견된 지역은 중국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무역로와 거의 일치한다. 중국왕망의 난에 가담했던 투후 김일제의 자손들은 왕망의 피살과 함께 뿔뿔이 흩어진다. <삼국사기>나 <삼국지 위지동이전> 등 역사서에는 대륙의 정세가 급변할 때마다 북방의 이주민이 한반도 남단 진한 땅으로 이주해왔다는 기록이 여럿 등장한다.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자손들도 신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화천


9. 성한왕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문무왕의 15대조는 김알지의 아들 세한이다. 추사 김정희가 비문의 내용을 집대성한 <해동비고>에 보면 문무왕비문에 기록된 성한왕은 바로 ‘김알지’라는 기록이 나온다. 비문의 성한왕에 대한 묘사는 김알지의 설화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분석된다. 성한왕은 바로 신라 김 씨 시조 김알지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에서 이주해온 김 씨가 세력을 형성하고 이주민에 불과했던 김 씨들이 최초의 왕인 미추왕을 배출한다. 문무왕에 이르러서는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 패권을 장악한다.
▲해동비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대당전쟁마저 승리한 문무왕. 그의 비문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석탈해가 사라지고 성한왕만이 존재한다. 신라는 이제 김씨 단독 왕국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바로 문무왕릉비문인 셈이다.

신라김씨왕족의 자신감은 신라김씨 시조 성한왕과 더불어 흉노 태자 투후 김일제까지 자신들의 뿌리가 닿음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무왕비문은 신라 김씨가 한반도의 패자로 성장해간 비밀을 담고 있는 고대사의 블랙박스였다.

 

그러면  흉노란 민족부터 알아볼까요?


( 흉노라 함은 중국이 주변의 유목민을 부르던 호칭으로 중국은 단군동이족인 시베리아와 몽고,요동지방의 유목민을
북흉노[=유럽을 정벌한 훈족]라 칭했고 서쪽 인도,파키스탄 북부지방의 유목민을 서흉노라 칭했음. 세계4대 정복군주로

로마를 멸망시킨 위대한 훈족인 아킬라는 북흉노족 임.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작았다는 기록과 출신지역이 시베리아,

동북지방이라는 것이 아틸라가 북흉노족 임을 증명 함. 인도, 방글라데시 북부지방인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가 시집온 것도

저들이 핏줄을 잇기 위한 결혼으로 저들이 서흉노 이민족이라는 하나의 증거 임.)

 

진시황이 서흉노족 중에 전쟁포로 및 범죄자들을 잡아다 만리장성을 쌓게 했던 지역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성을 쌓는 노역을 하던 중에 서흉노족 출신 약,5000명이 노역장에서 탈출하여 당시 약 40만명의 단군의 후손들이 살던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권을 잡았다는 기록이 중국의 역사기록에 남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를 건국한 시조는 진시황과 서흉노간의 전쟁 중 포획된 서흉노의 왕자로 노역장을 탈주한 5,000명을

이끈 실질적인 리더 였다고 하며 그가 바로 신라의 시조인 "투후, 김일제" 라고 확증하고 있다.

 

( 2000여년 전 당시 진나라 진시황이 실시한 호구조사서에 보면 중국 전체 인구가 약,5000만명이라는 기록이 있음.

현재 중국인구는 약14억 임.  현재까지 중국인구가 약, 28배 증가 했음.

그러므로 서흉노 전쟁포로, 이민족 범죄자 등등....5,000명도 약,  28배 늘었다고 보면 거의 정확하며 경주 김씨 전체문중의

숫자를 파악해보면 거의 비슷함.
신라로 넘어온 서흉노 이민족은  현재 5000 x 28 =14만명 정도 임(경주김씨 문중숫자는 약,15만추정). 현재 남북 총인구가

7,500만명 정도이므로 28배수로 나누어 보면  2,000년 전 당시 한반도 인구는 약 260만명 정도로 추정 됨)

 

즉, 위 내용을 추적해볼 때 신라의 건국시조를 명확히 찿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사를 얘기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라는 얘기이지요.

 

 

 

 

 

 글쓴이: 해야떠라 
 

출처 : 풀때기의 산행
글쓴이 : 풀때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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