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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등반의 아버지'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1740~1799)

by [대전]풀때기 2011.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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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등반의 아버지'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1740~1799)

 

18세기 천재 과학자, 몽블랑의 용(龍)을 물리치다

 

'악마 사는 곳' 믿던 때 현상금 걸고 과학적 등반 시작

 

17년간 '알프스 여행기'집필 '근대 등반의 아버지'로

 

 

 

제네바의 과학자 소쉬르는 몽블랑 초등에 상금을 내걸어 과학적 근대 등반 시대를 열었고,

그 자신도 몽블랑을 두 번째로 올랐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산은 예로부터 푸근하고 자애로운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모든 산에는 산신(山神)이 있고,

그가 산 아래 사는 우리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우는

히말라야 자락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 거대한 산들은 경외의 대상이었고, 신성불가침의 지역이었으며, 종교의 발상지였다.

어떤 뜻에서 히말라야는 그 자체를 하나의 종교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불교와 자이나교 그리고 힌두교 등은 자신들의 성지로 히말라야를 꼽는다.

 

그런데 유독 유럽에서만은 사정이 달랐다.

유럽인들은 중세 이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알프스에는 악마가 산다”고 믿었다.

이러한 태도가 4,000m 남짓 되는 특정한 고도 때문에 형성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쩌면 이것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특성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찌 되었건 그들에게 있어서 알프스란 악마가 살고 있고,

용(龍)이 머무는 곳(용은 서양인들에게 불길한 상징이다)이며,

때때로 벼락과 눈사태를 일으켜 인간을 괴롭히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한 마디로 그곳은 두렵고, 추악하며, 불편한 존재처럼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근대 등반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무지몽매한 미신들이 타파되어야 했다.

알프스 초기 등반기에서 그토록 많은 과학자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종교적 광신과 불합리한 미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그들이

알프스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학문적 연구’였다.

실제로 그들은 알프스에 오르면서 빙하를 연구하고, 지질을 탐색하고, 기압을 측정했다.

근대 등반의 여명을 밝힌 이들 과학자들 중에서도 단연 첫 손가락에 꼽혀야 될 사람이

바로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1740~1799)이다.

드 소쉬르는 스위스 제네바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천재 학자였다.

그는 14세 때 이미 대학에 진학했는데 이후 18세가 될 때까지

제네바 근교의 산들을 모두 섭렵할 정도로 왕성한 모험욕을 지닌 청년이었다.

19세가 되던 해에 대학교수직을 얻을 목적으로 ‘태양열에 관한 물리적 추론’이라는

자연과학 논문을 제출하고 나자 약간의 짬이 생겼다.

그가 스위스를 벗어나 알프스 저편의 프랑스 샤모니를 방문한 것은 이 즈음이다.

오늘날 알프스 최고의 산간 도시로 손꼽히는 샤모니는 그때까지만 해도

인적이 드문 산골 오지마을에 불과했다.

 

 

 몽블랑에 올랐던 때의 소쉬르의 옷과 장비

 

드 소쉬르는 프레방(2,526m)의 정상에 올랐다가

바로 코 앞에 거대한 성채처럼 우뚝 솟아있는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4,807m)을 보고 넋을 잃는다.

몹시도 흥분한 그는 “저 산의 정상에 제일 처음 오르는 사람에게 막대한 상금을 주겠노라”

공언한다. 1760년의 일이다.

하지만 현상금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15년 동안 몽블랑 정상에 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전에도 알프스 자락을 오르내린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대체로 수정 채취업자, 영양 사냥꾼, 약초꾼, 군인, 수도승 같은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종교적 군사적 목적이나 생활의 방편으로 ‘마지 못해’ 산에 올라야만 했던 이들이다.

그런데 다른 이유는 없고 오직 ‘산에 오르기 위하여’ 산에 오른다니,

그것도 ‘대악마’가 버티고 있는 몽블랑에 올라야 한다니 선뜻 지원자가 나섰을 리 없다.

몽블랑의 초등은 드 소쉬르가 상금을 내건 지 꼭 16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이루어졌다.

샤모니의 수정 채취업자 자크 발마와 마을의사 가브리엘 파카르가 그 주인공들이다.

 

 

 몽블랑은 알프스의 최고봉.

 자크 발마와 가브리엘 파카르가 맨 처음으로 오르기 전까지는

인간이 오를 수 없는 산으로 인식돼왔다.

 

그들이 몽블랑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당시만 해도 ‘세상을 뒤흔들만한’ 빅뉴스였다.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온 그들을 둘러싸고 빗발치듯 질문을 던져댔다.

“악마를 만났는가?”

“거기 용이 또아리를 틀고 있지는 않던가?”

발마파카르는 기진맥진한 채로 대답했다.

“아무 것도 없소. 저 위엔 눈과 얼음과 바위 뿐이요.”

“엄청나게 추워서 동상에 걸렸소.”

 “하지만 경치만은 정말 멋졌소!”

알프스에 대한 중세적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자크 발마. 가브리엘 파카르.

 

드 소쉬르는 물론 약속한대로 그들에게 초등 상금을 지급했다.

그리고 알프스는 이제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계 등반사는 몽블랑 초등(1786년)을 근대 등반의 시점으로 보고,

드 소쉬르‘과학적 근대 등반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드 소쉬르가 다만 상금을 내걸었을 뿐인 학자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듬해인 1787년 몸소 몽블랑 정상에 오른다.

몽블랑 재등 기록이다.

드 소쉬르는 정상에서 기압계를 이용하여 고도를 새로 측정했다.

그리고 3년 동안 제네바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알프스 지역을 여행하거나 산에 올랐다.

 

이미 알프스에 너무 깊숙이 빠져버린 그는 어렵게 얻은 교수직마저 미련 없이 내팽개치고는

‘알프스 여행기’(1796년)라는 4권 짜리 대저작의 집필에 몰두했다.

집필에만 무려 17년을 쏟아 부은 이 책은

18세기 알프스 지역에 관한 최고의 자료로 손꼽히며

특히 자연 경관에 대한 묘사들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드 소쉬르의 전공은 철학과 물리학과 광물학이었다.

그의 유명한 초상화를 보면

오른손에는 망치를 쥐고 있고,

왼편에는 기압계 혹은 망원경으로 보이는 물건이 놓여 있다.

편안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지만,

눈길은 저편 어딘가 높이 솟은 산봉우리를 향하고 있으며,

앙다문 입술과 강건한 턱이 몹시도 인상적이다.

그는 행동하는 학자였으며 공부하는 산악인이었다.

그의 학문과 등반은 중세적 미몽을 타파하여 ‘있는 그대로의 산’을 우리에게 선사해주었다.

오늘날 아무런 의심이나 두려움 없이 즐겁게 산에 오르는 모든 사람들은

이 위대한 ‘근대 등반의 아버지’에게 한번쯤은 경의를 표해야 한다.

 

▲ 돈·명예에 퇴색 한 초등의 영광

"파카르는 정상 못 섰다" 자크 발마의 거짓말…

훗날에야 바로잡혀

샤모니의 수정 채취업자 자크 발마와 마을 의사 가브리엘 파카르는

1776년 몽블랑 초등자로서 세계 등반사에 영원히 아로새겨졌다.

하지만 현상금이 걸려 있었고 희대의 스타가 되었던 일인지라 스캔들 또한 끊이지 않았다.

 최초의 발설자는 다름 아닌 자크 발마였다.

그는 명예를 독차지하고 싶었던지 이후

"파카르는 피로와 설맹과 동상으로 정상에 서지 못했다"고 떠들고 다녔던 것이다.

 

이 가설이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프랑스의 대문호 알렉상드르 뒤마의 역할이 크다.

1832년 샤모니를 찾아온 뒤마는 당시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유명 노(老)가이드 자크 발마를 만나 그의 영웅담을 경청한 다음

그것을 글로 써서 발표하였다.

대문호에 의해 각색(?)된 '몽블랑 모험담'이 얼마나 커다란

대중적 파급력을 발휘했을지는 불문가지다.

덕분에 샤모니 광장에 세워진 기념 동상의 두 주인공은 드 소쉬르와 자크 발마였다.

가브리엘 파카르의 이름과 역할은 역사에서 깨끗이 지워진 것이다.

 

훗날이나마 이것을 바로잡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드 소쉬르의 미공개 일기였다.

당시 파카르는 드 소쉬르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몽블랑 초등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소쉬르가 그것을 고스란히 일기에 적어놓은 것이다.

드 소쉬르의 일기에 따르면 파카르도 분명히 정상에 올랐을 뿐 아니라,

정작 상대방의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자크 발마였다고 한다.

등산이 추구하는 것이 '무상의 가치'라고는 하나

그것도 돈과 명예가 걸려 있으면 이런 식의 이전투구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싶어

씁쓸한 웃음을 짓게 하는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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