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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서 다리 잃은 최고의 알프스 등반가 제프리 윈스롭 영

by [대전]풀때기 2011.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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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서 다리 잃은 최고의 알프스 등반가 제프리 윈스롭 영

 

“다리 하나를 잃는 것은 우연한 사고에 불과하다

하지만 꿈과 용기를 잃는다면 전부를 잃는 것이다”

 

1차대전서 다리 잃은 최고의 알프스 등반가

 

수족잃은 사람들에 용기주려 외다리로 도전

 

7년간 고통의 재활 마터호른 등에 다시 올라

 

 

 

유럽 전역을 피로 물들였던 제1차 세계대전도 끝나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온 1920년대 중반의 알프스.

몬테 로사와 바이스호른 그리고 마터호른 등 저명한 등반 대상지의 아래 마을에서는

해괴한 몰골의 사나이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있었다.

낡은 피켈과 해진 등산복 그리고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은 여느 산악인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들에게 있는 것이 없고, 남들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잘려진 오른쪽 다리와 특수 제작된 의족이다.

만약 그가 무명의 장애인이었다면 기껏해야 세인들의 비웃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최고의 알프스 등반가’로 추앙받던

영국의 유명 산악인 제프리 윈스롭 영(18976~1958)이었다.

 

 

 

 

제프리가 다시 알프스의 고봉에 오르겠노라고 선언하고 나섰을 때

세인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제 아무리 뛰어난 등반가였다고 해도 의족을 한 채

알프스의 험봉들을 오르겠다는 것은 명백한 만용이다.

 

 

 

 

당시의 그는 바위에 기어 오르기는커녕

제대로 균형을 유지하며 걷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그 불편한 육신을 쥐어짜듯 비틀어대며

바위와 얼음벽에 올라 붙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제프리는 어깨와 머리를 이용하여 균형을 잡고,

크랙에 의족을 끼어 넣어 확보물로 이용하고,

손끝 한 마디에 매달려 자신의 몸을 허공에 띄웠던 것이다.

그의 등반 모습은 안쓰러웠지만 동시에 숭고했고, 처절했지만 동시에 아름다웠다.

 

 

 

 

제프리는 전쟁 중 폭격사고로 다리를 잃기 전에도 숱한 등반사고를 겪으며

생사의 갈림길을 여러 차례 넘어섰던 산악인이다.

그는 ‘글 잘 쓰는 산악인’으로도 명성을 떨쳤는데,

명석하고도 아름다운 문장과 진중한 철학적 태도로 많은 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전쟁 전의 제프리는 극한 등반을 즐기면서도

그러한 행위의 한계와 모순을 누구보다도 잘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제프리는 이렇게 썼다.

 

 

 

‘반드시 올라야 할 필요 따위는 없는 바위의 정상을 향해

우리가 벌이는 통쾌한 모험은 이성적으로건 도덕적으로건 정당화될 수 없다.’

그는 극한 등반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통쾌한 모험’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외다리 산악인’으로서 새롭게 시작한 등반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제프리의 답변은 의외로 도덕적이며 경건하기까지 하다.

“전시에 부상으로 수족을 잃고 무기력증에 빠진 숱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제프리는 자기 연민에 빠져 징징대는 타입의 사내가 아니다.

그렇다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잘난 체 하며

사회를 ‘계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유형의 인간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다만 산을 사랑하고 등반을 사랑했던 낭만적인 산악인이었을 뿐이다.

그런 그가 ‘용기’를 주고 싶었던 첫 번째 대상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전쟁에서 다리를 잃고 난 직후 그는 심각한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제프리는 진솔하게 고백한다.

“삶에서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낮으나 확고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린다.

“내가 현세에서의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산에 다시 오르는 것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소년 시절에 처음 바위에 매달린 곳은 웨일스의 스노우돈 산군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반복 회귀하며 자신을 달랬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이를테면 스노우돈은 그의 모산(母山)인 셈이다.

그는 바로 이 자신의 모산에서 새로운 형태의 등반을 위한 훈련을 시작한다.

요즘의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재활훈련’에 매달린 것이다.

당대 최고의 산악인들이 그의 재활훈련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그에게서 바위를 배우고 훗날 ‘에베레스트의 유령’이 되어버린 조지 리 맬러리,

당시 최고의 청년산악인으로 급부상 중이던 프랭크 스마이드 등이

그와 함께 기꺼이 자일을 맸다.

최고의 기량과 기품 있는 언행으로 존경 받던 중견 산악인 제프리는

이제 다리 하나를 잃은 대신 후배 산악인들의 도움을 얻어

외다리로 균형을 잡으며 다시 알프스의 창공 위로 날아오르게 된 것이다.

 

 

 

 

그는 다리를 잃은 지 7년 만에 피나는 재활훈련을 거쳐 기어코 몬테 로사(4,634m)에 올랐다.

오버행과 침니로 가득한 돌로미테의 침봉들 위로 올라선 다음에는

‘꿈에 그리던’ 바이스호른(4,505m)으로 눈을 돌렸다.

자신의 청년 시절, 6개의 루트로 도합 8번을 등정했고,

이때 남벽과 북벽에 낸 4개의 루트는 자신이 초등한 산이었다.

 

 

 

 

한 마디로 그의 청춘을 다 바쳤던 산이다.

제프리는 한쪽 발로 암탑과 눈처마를 통과하고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기어코 바이스호른의 정상에 다시 올라선 다음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결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인 없는 ‘영국 신사’ 제프리였지만

이때만큼은 알프스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설움이나 슬픔 때문이 아니라 기쁨과 감동의 눈물이었습니다.”

 

 

 

 

곧 이어 그는 약속대로 마터호른(4,477m)의 정상에도 오른다.

생애 5번째의 마터호른 등정이었다.

이후에도 이 ‘외다리 산악인’의 알프스 등정은 계속된다.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고백한 것은 로트호른 재등이었다.

 

 

 

 

25년 전, 그가 이튼스쿨의 교사로 재직 중일 때,

당시의 제자였던 마르쿠스와 풋내기 가이드 요세프 크누벨과 함께 초등을 이룩한 산인데,

이제 그들이 자신을 보살피며 다시 오르자고 하니 그 어찌 감격하지 않았겠는가.

25년 만에 한쪽 다리만으로 로트호른을 재등한 직후 제프리가 남긴 말이 인상적이다.

“다리 하나를 잃는 것은 우연한 사고에 불과하다.

하지만 꿈과 용기를 잃는다면 세상 전부를 잃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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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산악문학인 명성… 시인 예이츠와 우정나눠

 

 

 

 

제프리는 케임브리지 대학 재학시절 희랍어와 라틴어를 전공했는데

발군의 솜씨로 교수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내 등반에 미친 그는 학업을 게을리 하여 졸업시험에서 낙방했다.

공식적으로는 대학 중퇴의 학력에 불과한 그가

영국 최고의 명문 이튼스쿨의 교사로 채용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하지만 교사 재직시절에도 그는 제자들에게 등반을 가르쳐

그들 중의 상당수를 산악인으로 키워냈다.

 

 

 

 

제프리는 시, 소설, 에세이 등 문학의 모든 장르에 ‘등반’을 담아낸

최고의 산악문학 작가로서 명성이 높다.

산악시집으로는 <바람과 산>(1909), <자유>(1914), <4월과 비>(1923),

<제프리 윈스롭 영 시전집>(1936) 등이 유명하며,

에세이로는 <높은 산에서: 알프스의 추억>(1933), <또 다른 산>(유고집, 1951) 등이

걸작으로 손꼽힌다.

<높은 산에서>는 1차 대전 이전의 산행을,

<또 다른 산>은 다리를 절단한 이후의 산행을 주로 기록했다.

 

 

 

 

특히 제프리가 산악시인으로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가히 독보적이라는 것이

산악문학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세계문학사에서도 공인된 중평이다.

고난도의 등반 행위와 상세한 루트들을 완벽한 시의 형태 안에 녹여 표현해낸 사람은

그의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192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와

평생토록 깊은 우정을 나누며 산행과 시작(詩作)을 함께 즐겼다는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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