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무등산 1187M
산행날짜: 2012.01.28 (토)
산행코스: 무등산공원관리사무소 -> 오성원 -> 꼬막재 -> 규봉암 -> 장불재 -> 입석대 -> 승천암 -> 서석대 -> 중봉 -> 용추봉
-> 중머리재 -> 구.대피소 -> 당산나무 입구 삼거리 -> 증심사 입구 -> 증심사 -> 증심교 -> 무등산탐방안내센터
산행거리: 14.1 km
산행시간: 4시간 22분 (AM 10:50 -> PM 03:11)
차량탑승을 위한 도보 거리: 700m
도보 시간: 11분
산행속도: 약간 빠르게 (풀때기 기준)
산행난이도: 중하
소요된 음료: 생수 1000ml , 포드즙 2개
참가자: 풀때기 포함 대전 충일산악회 120명 이상 (관광버스 3대)
회비: 22000원
산행일정
무등산공원관리사무소 AM 10:50
오성원 AM 11:25
꼬막재 AM 11:29
신선대,규봉암 갈림길 AM 11:48
규봉암 PM 12:26
장불재 PM 01:11
입석대 PM 01:22
승천암 PM 01:27
서석대 PM 01:34
서석대 전망대 PM 01:41
중봉 PM 02:02
용추봉 PM 02:12
중머리재 PM 02:25
구.대피소 PM 02:36
당산나무 입구 삼거리 PM 02:50
증심사 입구 PM 02:54
증심사 PM 02:58
증심교 PM 03:08
무등산공원탐방안내센터 PM 03:11
주차장 PM 03:20
운림동석실고분 PM 03:22
버스탑승 PM 03:25
광주 무등산
위치
무등산은 광주광역시 북구와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및 담양군 남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동경 126°06′~127°01′, 북위 35°06′~35°10′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1,187m, 총면적은 30.23㎢(광주광역시 27.03㎢, 전라남도 3.20㎢) 이다
명칭유래
무등산은 비할데 없이 높은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라는 뜻이다. 북쪽의 나주평야와 남쪽의 남령산지(南嶺山地)의 경계에 있는 산세가 웅대한 산으로, 통일신라 때 무진악(武珍岳) 또는 무악(武岳)으로 표기하다가 고려 때 서석산(瑞石山)이란 별칭과 함께 무등산이라 불렸다. 이 밖에도 무당산·무덤산·무정산 등 여러 산명을 갖고 있다
자연환경
산세는 웅대하지만 산정 부근의 암석노출지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식생의 밀도가 높은 토산(土山)이어서 믿음직하고 덕이 있는 느낌을 풍기고 있다.
무등산은 동부의 산악 지대와 서부의 평야 지대의 결절점에 위치하고 있다. 북서·남동의 능선은 무등산 천왕봉에서 중봉(915m)·향로봉(367m)·장원봉(386m)에서 망월동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규모가 크다. 동서 방향의 능선은 무등산 천왕봉에서 중봉·중머리재(608m)·새인봉(490m)에서 학동으로 뻗어 있다. 무등산 천왕봉에서 남서 방향으로는 장불재(910m)·만연산(665m)·수레바위산(363m)·정광산·죽령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뚜렷하다. 이 산줄기는 북쪽의 극락강 수계와 남쪽의 지석천의 분수계를 이룬다.
무등산은 중생대 화상암 산지로서 산지 전체가 부드럽게 풍화되어 있고 곳곳에 주상절리(柱狀節理: 암괴나 지층에 있어서 기둥 모양의 절리가 지표에 대해 수직으로 형성되어 있는 형태) 경관이 있다. 이 주상절리는 남한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서 산정상이나 능선을 따라서 이들 주상절리와 관련된 성곽형의 토르(tor: 차별적인 풍화작용을 받은 결과 그 지역의 기반암과 연결되어 지표에 노출되어 형성된 독립성이 강한 암괴미지형)가 발달해 있다.
또한 산지사면을 따라 설형(舌形)으로 발달하는 암설의 퇴적지형인 애추(talus)가 발달되어 있다. 애추는 우리말로 너덜겅 또는 너덜지대라고 하고 가장 보편적인 주빙하기후 지형으로서, 기계적 풍화에 의해 단애면(斷崖面)으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진 암설이 집적된 지형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골이 많이 발달하였고, 153과 897종의 식물이 고루 분포하는데 그 중 465종은 약용식물이다.
광주광역시는 남부 서안형과 남부 내륙형의 점이지대에 속하며, 연평균 기온은 13.5℃, 강수량은 1,368㎜, 최한월 평균 기온이 0.5℃로 온화한 편으로 온대기후에 속한다. 무등산은 비교적 적설량이 많고 12~3월까지 눈이 내리고 1,000m가 넘는 무등산에 2주일 이상 눈이 쌓여 있는 경우가 많다.
형성 및 변천
암석은 대부분 중생대 백악기 중성 및 산성의 화산암류로 이루어져 있고 화강암과 석영반암이 곳곳에 관입되어 있다. 화산암 지대는 높은 산지가 발달하여 있고, 화강암 지대는 낮은 구릉이나 평야를 이루고 있다. 기반암에 따라 풍화양상이 다르고 곡지모습이나 사면발달 모습도 차별성을 보인다.
현황
특히, 마능선 일대에는 억새가 널리 분포하여 장관을 이루며 매년 가을에 열리는 ‘무등산 갈대제’ 행사가 유명하다. 무등산 일대는 산세가 웅장하고 산중에는 많은 명승고적이 있어 197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유적으로는 증심사(證心寺)와 원효사(元曉寺)의 2대사찰과 많은 암자들이 있다.
무등산 최대의 사찰인 증심사는 신라시대의 고찰로 오백나한전·오층석탑·칠층석탑·석조보살입상·증심사철조비로사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131호) 등을 소장하고 있다. 원효사는 신라시대 원효가 창건한 절인데, 증심사와 함께 한국전쟁 때의 공비토벌작전으로 소실되었다가 근년에 복구되었으나 그 규모는 휠씬 작아졌다.
광주 시내에서 원효사에 이르는 도중의 북구 충효동은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의병장인 김덕령(金德齡)의 출생지이며, 부근 산기슭에 그의 사우인 충장사(忠莊祠)가 있다. 무등산의 산정 가까이는 주상(柱狀)의 절리가 발달하여 기암괴석의 명소가 많다. 동쪽 사면을 따라 정상을 오르는 길에는 입석대(立石臺)·서석대(瑞石臺)·삼존석(三尊石)·규봉암(圭峰岩)·풍혈대(風穴臺) 등이 있고 정상 가까이에는 수신대(隨身臺)가 있다.
2005년 12월 16일에 무등산주상절리대 10만 7,800㎡는 천연기념물 제465호로 지정되었다. 화산활동의 산물인 무등산주상절리대는 수직으로 솟아오른 굵은 돌기둥과 동서로 길게 발달하고 돌병풍 등이 빼어난 지질 경관을 이루고 있어 학술적·경관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등산도립공원측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주상절리대를 일반인에게 공개하기 위해 8개월동안의 공사를 거쳐 2008년 12월 서석대(1,100m)를 개방하였다. 개방된 등산로에 나무판을 깐 산책로를 만들었고, 산책로는 서석대에서 조금 떨어진 입석대(1,017m)까지 이어져있다.
광주에서 무등산에 오르는 길은 증심사를 기점으로 하는 용추계곡 등산로와 원효사를 기점으로 하는 원효계곡 등산로가 있다. 광주광역시는 탐방객의 75%가 증심사 쪽으로 몰리는 것을 해소하기 위해 무등산공원 증심사지구 자연환경복원사업을 2006년부터 시작하여 2008년까지 진행하였다. 그리고 2009년 원효사쪽에 자연지형을 살린 옛길을 복원하였다. 조선시대 만들어져 1960년대까지 이용됐던 무등산 옛길 11.9㎞ 중 경사가 완만한 산수동·청풍쉼터·충장사·원효사 7.8㎞구간의 복원을 마치고 2009년 5월 개방했다.
완만한 산록 지대에서 많이 재배되는 수박과 차는 예로부터 무등산의 특산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등산 차밭은 허백련(許百鍊)이 맡아 일구어 삼애다원이라 이름 짓고 ‘춘설’이라는 녹차와 홍차를 생산하였다. 무등산의 웅장한 자태에서 생겨나는 정기는 광주학생운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문인·예술가 등을 배출시키는 근간이 되었다.
『한국의 지형』(권동희, 한울, 2006)
『자연지리학사전』(자연지리학사전편찬위원회 엮음, 한울, 1996)
『한국지지(韓國地誌)·지방편 Ⅳ·』(건설부국립지리원, 1986)
『관광한국지리(觀光韓國地理)』(김홍운, 형설출판사, 1985)
『한국관광자원총람(韓國觀光資源總覽)』(한국관광공사, 1985)
「무등산의 산지 지형 특색」(김현수, 한국교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경향신문』(2009. 2. 4)
『한겨레신문』(2009. 5. 14)
국토지리정보원(http://www.ngi.go.kr)
무등산도립공원(http://mudeungsan.gicity.net)
문화재청(http://www.cha.go.kr)
한국의 산천(http://www.koreasan.com)
현재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은 무등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할 것을 검토하고 있으며 2012년 하반기에 지정여부가 결정된다
무등산 주상절리대는 세계 유엔 유네스코에 자연유산으로 등재준비중이다
다녀간 무등산 지도
무등산공원관리소 하차
해발 370M
AM 10:50
출발
오성원
AM 11:25
꼬막재
640M
AM 11:29
신선대,규봉암 갈림길
AM 11:48
북산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정곡리에 위치한 산이다(고도:778m). 호남정맥이 남쪽으로 뻗으면서 무등산으로 오르기 전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선대' 또는 '고산(鼓山)'이라고도 부른다. 주변은 억새평전이고, 정상에 주상절리가 있으며, 그 위에 무덤이 1기 있다. 정곡리는 가마솥 형국으로 5일장이 열리기도 했다. 절골에는 서봉사지(瑞峯寺址)가 있다.
지인 다니엘님의 시그널
지인 똥벼락님의 시그널
규봉암
950M
PM 12:26
규봉암(圭峰庵)은 전라남도 화순군 무등산(無等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다.
절 주변에는 여러 가지 기묘한 모습의 바위들이 솟아 있어서 경치가 썩 좋다. 은신대,삼존석,십이대,광석대,풍혈대,설법대 등의 기암기석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데, 이들은 모두 단순한 바위가 아니라 고승들이 수도했던 수도처라고 한다. 특히 무등산 정상부터 밑으로 3㎞가량 널려 있는 돌무지인 지공너덜은 그 가운데서도 압권이라고 할 만한다. 인도에서 왔다는 지공(指空) 스님이 수도한 곳이라고 ‘지공너덜’이라고 부르는데, 지공 스님의 제자 나옹(懶翁) 스님도 스승을 이어 이곳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규봉암 자체는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은 작은 암자이지만 역사가 오래 되었고 이곳에 머물렀던 고승들도 많다.
7세기에 의상 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절의 창건연대는 문헌에는 존재하지 않음). 신라 말에 도선 국사가 이 절 부근에 있는 은신대에 앉아 조계산의 산세를 살펴 송광사 터를 잡았다는 전설도 있는데, 규봉암 무등산과 조계산의 산세가 서로 이어지는 것처럼 역사적으로 두 절이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고려 후기에는 보조국사 지눌(知訥), 진각국사 혜심(慧諶) 스님 등이 삼존석과 십이대에서 각각 수도하여 득도했다고 전한다. 이 말 의 진실 여부를 떠나서 규봉암과 그 주변은 그 만큼 예로부터 많은 수행자들이 수도하던 곳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출처: 부다피아
장불재
900M
PM 01:11
광주광역시의 동구 지원동 관할 용연동과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사이의 고개이다. 무등산 정상인 천왕봉에서 남서쪽으로 서석대와 입석대를 거쳐 내려선 고개마루가 있다. 억새 군락이 장관이다. 고개 서편 샘골에서 광주천이 발원한다. 『대동지지』에 '장불치(獐佛峙)'로 기록되어 있다. '긴골' 또는 '장골'을 한자로 장불치(長佛峙)로 표기했다. 말 잔등 같은 능선이라 '백마능선'이라고도 칭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장불동에서 철이 생산되었고, 『유서석록』에 "장불천은 그 상류에서 쇠를 씻기 때문에 언제나 탁한 물이 흐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등산 주상절리대
무등산 주상절리대는 중생대 백악기에 발생한 화산활동의 산물로써 용암이 냉각 ∙ 수축하면서 형성되었으며, 오랜세월 풍화에 의해 기둥모양 또는 병풍모양을 하고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주상절리대는 입석대와 서석대 그리고 규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입석대와 서석대의 돌기둥 하나의 크기가 지금까지 남한에서 보고된 것 중 최대의 것으로 주목 받고 있다. 특히 주변의 수목 및 무등산과 어울려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465호 -광주시에서는 주상절리대를 세계자연유산등재 추진중-
입석대(전망대)
무등산의 정상 1,017m 지점에 있는 돌기둥의 무리이다. 무등산의 대표적인 절경의 하나로 장불재(長佛峙)에서 동쪽으로 약 200m 올라가면 정상의 서쪽에 있다.높이 10∼15m의 돌기둥이 반달모양으로 둘러서 있는 석경은 다른 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경관이다. 돌기둥은 5∼8면체의 각석(角石)이며, 하나의 암주(巖柱)나 3,4단의 석주(石柱)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 바위에 ‘立石(입석)’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축단을 통해서 이곳이 가뭄이나 질병의 전염이 심할 때 지방관리들이 하늘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제를 지내던 제천단(祭天壇)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여도 이곳에 입석암(立石庵)을 비롯하여 주변에 많은 암자와 절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입석대
1017M
PM 01:22
입석대 주변 이야기
제봉 고경명 선생이 쓴 유서석록에 의하면 입석대 주변에는 입석암 , 상원등암 , 상일암을 비롯한 10여개의 자그마한 암자들이
바위 사이에 자리하고 함께 어우러져 무등산 제일의 명소라고 했다. 그 흔적으로 기둥을 세웠던 구멍뚫린 주춧돌을 쉽게 찾아볼 수가 있어서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승천암
옛날 이 부근의 암자에 무엇엔가 쫒기던 산양을 스님이 숨겨준 일이 있었다. 어느날 스님의 꿈에 이무기가 나타나 산양을 잡아먹고 승천해야 하는데 네가 훼방을 놓았다며 만약 종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너라도 잡아먹어야 겠다고 했다. 얼마후 난데없이 우렁찬 종소리가 들렸고 이무기는 곧장 스님을 풀어주고 승천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얽힌 바위이다
PM 01:27
서석대
1100M
PM 01:34
2010년 6월 17일 서석대 정상 1100m 지점에 설치되었다 (높이 150㎝, 폭 80㎝, 두께 30㎝, 무게 1.5t)
표지석의 앞면은 영암 월출산을 향하고 있고 뒷면은 무등산 정상인 천황봉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표지석 글씨는 국전 심사위원인 서예의 대가 학정 이돈흥 선생이 썼다
표지석은 장불재 주변에서 채취한 원석을 바탕으로 광주 시내에서 제작돼 차량으로 장불재로 이동된 뒤 산림청 헬리콥터로 서석대까지 옮겨졌다
광주의 氣像(기상) 이 곳에서 發源(발원)되다
인왕봉
서석대 전망대
PM 01:41
중봉가는길
중봉
915M
PM 02:02
용추봉
830M
PM 02:12
중머리재
광주광역시의 동구 학운동 관할 운림동과 지원동 관할 용연동 사이의 고개이다. 무등산 천왕봉에서 서석대를 거쳐 중봉으로 내려선 능선이 삼광대 아래로 이어지면서 잿등을 이룬다. 남서쪽으로는 서인봉으로 향하는 등산길이다. 『유서석록』에 '중령(中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갯마루가 넓은 초원지로 마치 스님의 머리 닮아 '중머리[僧頭峯]'이라 한다.
PM 02:25
구.대피소
PM 02:36
당산나무 입구 삼거리
PM 02:50
증심사 입구
PM 02:54
증심사 부도
증심사
PM 02:58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860년(헌안왕 4) 철감선사(澈鑑禪師)가 창건하였고, 1094년(선종 11)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수하였으며, 1443년(세종 25) 전라도 관찰사 김방(金倣)이 자신의 녹봉으로 중창하였다.그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1609년(광해군 1) 석경(釋經)ㆍ수장(修裝)ㆍ도광(道光) 등의 선사들이 중창하였고,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임제종(臨濟宗) 운동의 본부가 되었다. 그 뒤에도 중수를 거듭하다가1951년 4월 50여 명의 무장공비들에 의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버렸으며, 1971년에 크게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오백전(五百殿)과 대웅전ㆍ지장전(地藏殿)ㆍ비로전(毘盧殿)ㆍ적묵당(寂默堂)ㆍ종각ㆍ일주문ㆍ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오백전을 제외한 건물들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오백전은 대웅전 뒤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초기에 지어진 강진 무위사(無爲寺)의 극락전과 같은 계통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전내의 오백나한상은 1443년의 중창 때 김방이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 오는데,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불상이다.오백전 옆에는 높이 205㎝의 석불 1구가 있는데, 고려시대(10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보살입상으로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로전 안에 안치된 높이 90㎝ 정도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철불은 본래 광산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에 옮겨온 것이다.
이밖에도 문화재로는 증심사 창건 때 만들었다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인 삼층석탑,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1933년의 보수 때 탑내에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금동보살 입상 등이 나왔던 오층석탑,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칠층석탑 등이 있다. 특히,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석조보살입상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이 절 입구의 왼쪽 산록에는 약 3만여 평의 차밭이 있다. 이 차밭은 원래 증심사에서 공양을 위하여 가꾸어왔던 것이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경영하였고 광복 후에는 허백련(許百鍊)이 인수하여 고유의 차를 재배하였다. 절 주변이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전통사찰총서』(사찰문화연구원, 1996)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권상로 편,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문화재관리국, 1977)
증심사 삼층석탑
높이 3.2m.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무등산(無等山) 서쪽에 위치한 증심사 대웅전 뒤편 오백전(五百殿)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 그대로 전수된 것으로 기단부(基壇部)는 2중기단인 통식이다.
하층기단을 보면 각 면에 양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중앙에 탱주(撑柱 : 받침기둥) 2주를 세우고 그 안에 정교한 안상(眼象)을 새겼다. 하대갑석은 4매 판석(板石)이고 상면중앙에 3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상층기단을 받고 있다. 중석 역시 4매판석으로 4면에 각 우주와 중앙에 탱주 1주를 새겼다.
상대갑석은 하면에 부연(副椽)을, 상면은 하대갑석에서처럼 3단의 각호(角弧)·각형(角形) 굄대를 둘렀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이 각 1석씩인데, 각 층마다 4면에 양 우주를 세우고 2층부터는 알맞게 체감되었다.
옥개석 층급받침은 각 층마다 4단이고 상면에 1단의 굄을 두었으며, 낙수면(落水面)은 추녀 끝에서 약간 반전(反轉)되었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과 앙화(仰花)가 1석이고 그 위에 작은 보주(寶珠)가 놓여 있다. 1971년에 완전 해체, 복원한 바 있고 일부 옥개석의 파손부분이 있다.
『문화재도록(文化財圖錄)』(전라남도, 1981)
증심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
높이 90㎝. 보물 제131호. 원래는 전라남도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 증심사로 옮겨온 것으로, 광배와 대좌는 잃어버렸지만 불신(佛身) 자체는 완전한 편이다.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육계(肉髻))는 높은 편으로 세장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갸름한 얼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눈·코·입 등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어 온화한 느낌을 준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으며, 귀는 짧은 편이다.
어깨는 넓고 반듯하며 결가부좌한 무릎의 너비도 넓어 안정된 좌세(坐勢)를 이루고 있다. 두꺼운 법의에 싸인 신체는 평판적으로 몸의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가슴 앞이 넓게 V자형으로 노출되었고, 두꺼운 옷자락이 양팔에 걸쳐 규칙적인 평행의문선(平行衣文線)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특히, 배 부근과 다리에는 굵은 몇 가닥의 옷주름만을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두 손은 가슴 부근으로 올려 왼손이 오른손을 감싼 지권인(智拳印)으로, 손의 위치가 통식(通式)과는 반대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조각수법에서 볼 때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과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등과 같이 신라 하대에 조성된 철조비로자나불의 하나로서, 조성연대는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文化財大觀-寶物 中-(文化財管理局, 1969)
韓國彫刻史(文明大, 悅話堂, 1980)
國寶 2-金銅佛·磨崖佛-(黃壽永 編, 藝耕産業社, 1986)
新羅下代毘盧舍那佛像彫刻의 硏究(文明大, 美術資料 21·22, 1978)
오백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 사지(寺誌)에 의하면, 1443년(세종 25) 김방(金倣)이 중심사를 삼창(三創)할 때 오백나한(五百羅漢)과 십대제자상(十大弟子像)을 조성, 봉안하였다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소실되어, 1609년 석경(釋經)·수장(修裝)·도광(道光)의 삼대선사(三大禪師)가 사창(四創)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때 오백전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오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증심사 경내의 뒤편의 경사지를 다듬어 높은 축대를 쌓고, 이 축대 위에 높이 1.8m 정도로 쌓은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 주두와 익공을 하나 놓아 굴도리로 결구한 초익공집이다. 가구는 5량가(五樑架)로서 전후 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고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걸고 다시 종량 위에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그러나 양측벽에서는 이고주(二高柱) 오량가구(五樑架構)이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양측 박공면에 풍판은 없다. 정면 3칸 중 어칸에는 빗살창호 네짝을, 다음 측칸에는 두짝을 달았다.
전내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은 어칸에는 종량 높이로 우물천장을 설치하고 양 측칸은 연등천장이다. 불단을 후벽 앞에 만들고 오백나한과 십대제자상을 모시고 있다.
증심사석조보살입상
보살상 높이 2.05㎝. 대좌 높이 55㎝.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 이 보살상의 원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서봉사지(瑞峰寺址)에서 이전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형의 앙련대좌(仰蓮臺座)는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 및 지대석을 모두 갖추었다. 상대석의 연화좌는 11엽의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과 2엽의 큼직한 연화당초문이 혼합되어 조각되어 있다. 하대석의 복련좌(伏蓮座)는 두툼한 16엽의 복판연화문(復瓣蓮花文)을 돌렸다.
지대석 역시 원형으로 측면을 분할하여 연화문을 만들었으나 분할을 잘못하여 8엽반(八葉半), 즉 9엽이 되어 있다. 대좌 위의 보살입상을 보면 머리에는 높은 원통형보관을 썼고, 타원형의 갸름한 얼굴에는 우아한 기품이 보이며 선각된 삼도아래 목걸이가 조식(彫飾)되어 있다.
납의(衲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이며, 몸 전체에 조식된 의문(衣文)은 깊지는 않으나 매우 유려하다. 수인은 왼손을 펴서 왼쪽 가슴 위에 올려놓았고, 바른손은 편채로 내려뜨려 바른쪽 대퇴부 바깥쪽에 붙이고 있다. 이 보살상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증심교
PM 03:08
무등산공원 탐방안내 센터
산행종료
PM 03:11
주차장
PM 03:20
운림동석실고분
PM 03:22
이 돌방무덤은 백제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광주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여서 중요한 자료이다.
이 부근에는 6기의 고분이 있으나 돌방의 모양이 알려진 것은 2기뿐이다. 1호 무덤은 쪼갠 돌을 쌓아올리고 천장에 2개의 뚜껑 돌을 놓아 그 무게로 양쪽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균형을 맞추었다. 무덤방의 밑바닥은 얇은 판석을 이중으로 깔아 물이 고이지 않도록 했다. 비교적 봉분이 잘 남아있는 2호 무덤은 1호 무덤보다 약간 높은 곳에 있으며 모양은 1호 무덤과 같다.
충일산악회 버스탑승 (3호차)
PM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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