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 황장산 942M
산행코스: 골안산장 -> 당재 -> 평도마을 능선삼거리 -> 황장산 -> 중기마을 능선삼거리 -> 새끼미재 -> 촛대봉 -> 촛대바위
-> 삼각점 -> 약천사 표지판 -> 큰재 -> 화개삼거리
산행거리: 12km 내외
산행시간: 3시간 54분 (PM 12:06 -> PM 03:54)
산행속도: 약간 빠르게
산행난이도: 하
산행날씨: 맑음
소요된 음료: 생수 1000ml
참가자: 풀때기 포함 소월 산악회 45명(산행팀 6명,여행팀 39명) 내외 만차 (관광버스 1대)
회비: 15,000원
산행일정
롯데 승차 AM 08:47
골안산장 산행시작 PM 12:06
당재 PM 12:34
평도마을 능선삼거리 PM 01:25
황장산 PM 02:21
중기마을 능선삼거리 PM 02:22
새끼미재 PM 02:34
촛대봉 PM 02:45
촛대바위 PM 03:02
삼각점 PM 03:15
약천사 표지판 PM 03:18
큰재 PM 03:33
화개삼거리 산행종료 PM 04:00
버스 승차 PM 04:13
버스 출발 PM 05:04
롯데 하차 PM 07:55
경남 하동 황장산
지리산 황장산은 불무장등 능선으로 불무장등, 통꼭봉, 황장산, 촛대봉을 일으켜 세우고 섬진강에 그 꼬리를 내린다. 황장산은 지리산 3대 봉우리 중의 하나인 반야봉에서 삼도봉을 거쳐 남쪽으로 뻗어내린 불무장등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황장산의 한문 표기가 잘못되어, 지금은 ‘누른 노루’라는 ‘황장산(黃獐山)’으로 쓰고 있으나 원래의 지명은 정상(고개)까지 멀고도 먼 산이라는 뜻인 ‘항장산(項長山)’이었다.”봉(峯)이 아닌 불무장등(不無長嶝·1,446m)이란 한자 이름 그대로 ‘없지 아니한 긴 산등성이’처럼 그저 밋밋한 고갯마루 같은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올바른 표기는 불교에서 최고의 지혜를 뜻하는 반야(般若) 또는 불모(佛母)란 용어를 사용하는 데서 유래한 것. 불모장등은 반야봉에서 시작한 반야장등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이다. 반야라는 중복된 글자를 피하고 같은 의미인 불모장등(佛母長嶝)이란 표기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불모’는 ‘불무’로도 읽어 현재의 ‘불무장등’이란 표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불무장등 능선도 반야봉에서 시작돼 남쪽으로 화개면 탑리까지 이어진 능선을 이른다”는 것이다.황장산도 지리산의 일부분 이지만 지리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의 통제를 받지 않는 지역이라 산불방지기간이면 부분적으로 출입이 제한되는 지리산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어 좋다. 황장산에서 2.6km거리에 남근석 또는 올빼미바위라고도 하는 촛대봉이 있다. ‘촛대봉(721.5m)에서, 화개 5.0km, 황장산 2.6km, 당재 3.4km이다.봉래봉 또는 삼각봉이라 불렸다는 이곳은 숲에 가려 조망은 좋지 않다. 다행히 정상석 뒤편이 트여 삼신봉을 중심으로 지리산 남부능선과 낙남정맥의 산줄기를 읽을 수 있다. 오른편에 시루봉 원강재 형제봉도 보인다. 정상석 뒤로는 삼신리로 내려서는 하산길이다. 촛대봉에서 황장산까지는 1시간정도 걸린다.
참고자료
한국의 산하 사이트 발췌 (http://www.koreasanha.net/san/hwangjangsan-hadong.htm)
다녀간 황장산 지도
원본 지도
(손모양 아이콘을 눌러주세요)
목통골 부근 골안산장 하차
산행 시작 (산행팀 6명)
PM 12:06
당재
PM 12:34
평도마을 능선 삼거리
PM 01:25
황장산에서 바라본 지리산 능선
황장산 942M
PM 02:01
중기마을 능선 삼거리
PM 02:22
황장산 능선에서 바라본 내삼신봉,시루봉 능선
외곡리 방향 조망
7배줌
새끼미재
PM 02:34
촛대봉 721M
PM 02:45
풀때기
촛대바위
(올빼미바위,남근석이라고도 부른다)
PM 03:02
삼각점
PM 03:15
약천사 표지판
PM 03:18
큰재
PM 03:33
화개삼거리 부근으로 하산완료
PM 04:00
버스 승차
PM 04:13
PM 05:00 까지 집합이라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화개장터와 학도병전적비,하동녹차를 구경
화개장터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 있는 재래시장.
화개장터는 옛 화개장 터에 현대에 들어와 복원한 재래식 시장이다. '화개시장'이라고도 부르지만 옛 명칭을 그대로 써서 '화개장터'로 부르는게 일반적이며, 공식 명칭 역시 '화개장터'이다. 화개장은 본래 화개천이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열리던 장으로, 섬진강의 ‘가항종점(可航終點)’ 즉 행상선(行商船) 돛단배가 들어올 수 있는 가장 상류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이곳에 대규모의 장터가 들어서게 되었다. 화개장은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있으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에 소속되어 있고, 5일마다 정기적으로 장이 섰다. 조선 시대 때부터 중요한 시장 중의 하나로 주로 지리산 일대의 산간 마을들을 이어주는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옛날에는 섬진강의 물길을 주요 교통수단으로 하여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이 시장에 모여, 내륙에서 생산된 임산물 및 농산물과 남해에서 생산된 해산물들을 서로 교환하였다.
건립경위
현재 복원된 화개장터는 옛날 화개장터의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1999년 12월 4일에 하동군 화개면 탑리 726-46번지 등 부지 면적 9,917㎡에 17억 원 가량의 예산을 투입하여 전통 장옥 3동, 장돌뱅이들의 저잣거리와 난전, 주막, 대장간 등 옛 시골장터 모습을 원형 그대로 되살리고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등 편의 시설을 곁들여 2001년 봄에 개장하였다.
변천
화개장이 언제부터 형성되어 상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화개면지』에서는 「조선 시대 하동 지역의 시장 분포[1770-1830]」라는 제하(題下)에서 당시의 시장 다섯 곳을 소개하면서, 화개장은 1770년대에 1일·6일 형식의 오일장이 섰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하동군사(河東郡史)』의 기록을 보면 1913년경에는 2일·7일 형식으로 장이 서다가 1928년경부터 1일·6일로 바뀌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중간에 개시 일에 다소 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하동군사(河東郡史)』에서는 “옛적에는 화개장이 전국 7위의 거래량을 자랑한 큰 시장이었고", "남원과 상주의 상인들까지 모여들어 중국 비단과 제주도 생선까지도 거래를 했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로서는 다른 시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해방 이후에도 1일과 6일에 서는 정기시로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 등으로 산촌이 황폐해지면서 화개장도 함께 쇠퇴해 갔다.
1948년 김동리(金東里)가 소설 「역마(驛馬)」를 쓸 당시의 낭만어린 화개장터는 현대화 바람에 의해 사라지고, 현재 그 자리에는 상설 상점 및 식당, 그리고 노래방과 술집 등 유흥업소 등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지금은 화개면사무소 앞 쪽 화개다리 옆에 1997년부터 복원한 현대식 화개장터가 옛날 전통시장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구성
화개장터는 공공시설과 사유 시설로 구성이 되어 있다. 공공시설로는 야외 장옥 3동·화장실·전망대·대장간·물탱크실·관광 안내 센터가 있으며 총 대지 면적은 3,012㎡이며, 건축 면적은 595.54㎡, 연면적은 391.29㎡, 건폐율은 19.77%, 용적률은 12.99%이다. 그리고 사유 시설로 구장옥 4동이 있으며 대지 면적은 3,330㎡이고, 건축물의 면적은 749.7㎡이다. 이 중 야외 장옥 3동과 관광 안내 센터·대장간·물탱크실은 모두 목구조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화장실은 경량 철골에 와이어 판넬로 되어 있고, 전망대는 목구조에 한식 기와로 되어 있다. 구장옥 4동은 경량 철골에 와이어 판넬, 목구조에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다.
현황
현재 화개장터의 점포수는 야외 장옥 3동 79개, 구장옥 3동 18개, 난전 12개, 좌판 및 보따리 점포 15개 등이다. 야외 장옥 3동에서는 지리산과 섬진강에서 나는 특산물인 야생녹차·둥글레·더덕·오미자·천마·참게장과 같은 약재 및 식품 등을 주로 취급하고 있다. 구 장옥 3동은 5개의 일반 식당, 4개의 다구 및 녹차 가게, 2개의 개량 한복 가게, 그리고 1개의 기념품 가게로 구성되어 있다. 음식점에서는 보리밥·산채비빔밥·국밥·참게탕·재첩·은어회·도토리묵 등을 팔고 있다.
화개장터에는 '화개장터'라고 쓰인 표지석과 화개장터의 유래 및 「화개장터」노래 가사를 적은 석조물, 역마상과 옛 보부상의 조형물이 있다. 또한 장터 내에 작은 공원이 있으며, 화개장터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기념하는 화개장터 삼일운동 기념비도 서 있다. 매년 4월 초가 되면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10리에 걸쳐 벚꽃이 만발하며, 화개장터 벚꽃 축제가 열려 민속놀이 체험과 녹차 시음회 등 여러가지 행사를 벌인다. 또 5월에는 하동 야생차 문화 축제 기간에 맞춰 화개장터 역마 예술제도 열린다. 이는 김동리의 소설 「역마」를 주제로 하는 예술제로서 마당극과 판소리 공연 등이 펼쳐진다. 화개장터는 이제 영호남의 물산이 교류되는 시장을 넘어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하동의 물산과 문화를 찾아 방문하는 하동의 명소가 되었다.
참고문헌
여재규, 『하동군사(河東郡史)』(신영사, 1978)
『화개면지』(화개면지편찬위원회, 2002)
『통계연보』(하동군, 2009)
『한국일보』(2004. 11. 14)
하동군청(http://www.hadong.go.kr)
박경리 토지길 안내지도
박경리 토지길은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를 따라 걷는 1코스와 화개장터에서 십리벚꽃길(혼례길)~차시배지~쌍계사석문바위~쌍계사~불일폭포에 이르는 13km의 산과 강, 인간이 만든 눈속에 꽃이 핀 고장 화개 길을 걷는 2코스로 되어있다
화개장터 모습
대장간
약초방
화개장터 3.1운동 기념비
화개장터는 하동군의 3·1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현장이다. 1919년 4월 6일 쌍계사 승려와 학생 김주석(金周錫)·양봉원(梁鳳源)·정상근(鄭相根:丁湘根) 등이 앞장서고 애국 청년 이강률(李康律)·이정수(李汀秀)·임만규(林萬圭)·이정철(李正哲) 등이 동참하여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장꾼 300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감화를 받은 이강률·이정수·이정철·임만규 등은 4월 11일 화개장날에도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화개면장, 면 직원 사직 권고문을 작성하여 화개면 삼신리에 있던 화개면사무소 앞에 게시하고 화개장터 3·1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경에 발각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김주석은 징역 6개월, 양봉원은 집행 유예 3년, 이정수는 징역 10개월, 이강률은 징역 8개월, 이정철은 징역 8개월, 정상근은 집행유예, 임만규는 징역 8개월이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뒤에 이정수는 건국포장, 임만규과 이강률 등은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다른 이들은 미포상되었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전통 방식의 효자비, 열녀비와 비슷한 모양을 가진 비석이다. 기단은 사각형 화강암에 무궁화를 새겼고, 비신(碑身) 위에는 지붕 모양을 갖춘 양식이다. 높이는 2.7m이다.
학도병전적비 안내문
학도병 전적지는 6·25 전쟁 당시 전남 동부 6개 군에서 6년제 중학교에 다니던 16∼20세의 어린 학생 180여명이 혈서로 지원 입대한뒤 그해 7월 25일 전략적 요충지인 화개장터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70여명이 사상 또는 실종돼 그 중 26명이 묻힌 곳이다. 당시 순천에서 재편성된 제5사단 15연대 1대대(부대장 조남철 소령·중대장 정태경 중위)의 학도병 부대에 배속된 이들은 화개장터로 들어서는 북한군 6사단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 숨진 채 이 일대에 흩어져 있는 것을 지역 주민들이 수습해 묻었다.이후 이곳 전투에서 생존한 전우와 유가족, 보훈단체 등이 조국의 위기에 방패가 된 못다핀 어린 꽃송이 같은 학도병들을 진혼하고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억하고자 매년 7월 25일 이곳에서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학도병전적비
학도병전적비에서 바라본 조망
하동녹차
녹차는 차나무 잎을 따서 발효시키지 않은 찻잎을 사용해 만든 차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소엽종의 차나무는 연평균 기온이 약 10℃ 이상으로, 온난하고 연평균 강수량이 1,500㎜ 이상인 다습한 지역에서 잘 자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륙성 기후로 겨울에는 혹한이 심하고 일교차가 매우 커서, 차나무가 자연 상태로 자랄 수 있는 북방 한계 위도가 북위 약 33.35도이다.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의 차 재배지는 전라북도 김제, 옥구, 남원과 경상남도 함양, 밀양, 울산의 남쪽 지역 정도이며, 대부분의 차가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그리고 제주도에서 생산되고 있다.
하동은 우리나라 차의 시배지이며, 차가 주요 토산물이었고, 또 그 질도 매우 우수했음이 여러 문헌 기록에 보이고 있다. 우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 시대인 828년(흥덕왕 3)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공이 차 종자를 가지고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신라에는 7세기 전반인 선덕여왕[재위 632~647] 이전에 이미 차가 있었고, 흥덕왕 때에는 차를 마시는 풍속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6세기 전반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흥덕왕의 명에 의해 지리산에 차를 심었다는 사실이 진주목 토산조에 기록되어 있다. 이 두 기록을 통하여 진주목에 속하였던 지리산 부근, 즉 하동이 차의 시배지로 이미 신라 시대부터 알려져 있었으며, 지리지 토산조에 기록될 만큼 대표적 차 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화개를 찾아와 차를 맛보기도 했다. 13세기 전반 화개는 당시의 대표적인 차 산지로 알려져 2월 말까지 조정에 차를 진상하였는데, 차 공납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이 매우 심하였다 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하연(河演)[1376~1453]은 판서 민의생(閔義生)이 중국으로 사행을 떠날 때 화개차를 주면서 「민의생 판서가 중국에 사신감에 화개차로 이별하며 짓다」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그 시를 보면, "화개골의 차 좋다고 익히 들었는데/ 맑기는 양선산(陽羨山) 차 같고/ 차 향기 중하기는 금옥 같다오/ 이 차(茶) 마음 담아 노자로 보내네"라 하였다. 중국으로 사행을 떠나는 사신의 행장에까지 화개차가 들어 있었으니, 당시 화개차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차와 선을 같다고 이야기 한 초의 선사(草衣禪師 ) 의순(意徇)[1786~1866]은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우리나라 차를 예찬했는데, 특히 화개차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면서, “화개동의 차밭은 골짜기와 난석(欄石)을 모두 갖추고 있어 여기에서 생산되는 화개차의 품질은 당연히 좋은 것이다.”라고 칭송하며, 화개차의 우수성을 노래하였다.
하동녹차 제조(생산) 방법 및 특징
하동녹차는 찻잎 따기-덖기-비비기-건조-끝 덖기-선별 및 포장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찻잎은 보통 4월 하순부터 5월 하순까지 따며, 따는 시기에 따라 우전, 세작, 중작, 대작으로 분류하며 홍차나 티백은 그 이후로 넘어간다. 찻잎은 새순이 돋아나는 여린 잎 한두 마디를 따며 밤이슬을 흠뻑 머금은 오전에 따는 것이 최고요, 한낮에 따는 것은 그 다음이며, 흐린 날씨나 비가 올 때는 따지 않는다.
그날 따온 잎을 멍석에 깔아놓고 큰 잎, 묵은 잎, 줄기, 부스러기를 가려낸 다음, 솥이 잘 달구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적당한 양을 넣고 빠른 시간에 덖는다. 찻잎을 덖으면, 맛이 구수하고 향기가 좋아질 뿐만 아니라, 찻잎의 수분을 제거함으로써 부패되거나 변질되는 것을 방지하고, 차의 성분을 오랫동안 보존하면서 운반과 보관이 편리한 이점이 있다.
잘 덖은 찻잎은 열기를 없애고 차의 성분이 배어들도록 멍석에서 비빈다. 비비기 작업은 이 찻잎 표면의 막을 제거하거나 상처를 내어 물과 차가 융합할 때 차의 성분이 쉽게 물에 우러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찻잎의 즙액을 세포 밖으로 밀어내어 건조를 촉진시키는 작용도 한다. 찻잎의 덖기와 비비기는 불[온도]을 조절해 가며 수차례 반복한다.
건조의 앞 수순으로 멍석에서 비빈 찻잎을 서로 낱순이 되도록 분리시킨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차를 건조할 때는, 온돌방에서 한지를 깔고 말리거나 선반에서 자연 건조한다. 마지막 열처리 과정으로,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충분히 덖어 마무리하는 것이 좋으며 이 과정이 차 맛에 큰 영향을 미친다. 덖기가 잘 이루어지면 차의 빛깔과 향기가 아름답고, 차의 신비로움과 싱그러운 맛을 겸한 오묘함이 나타난다. 차를 선별, 포장할 때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키를 이용하여 부스러기를 골라내고 좋은 찻잎을 골라낸다.
하동군의 주요 차 재배 지역은 섬진강과 그 지류인 화개천에 연접해 있어 안개가 많고 다습하다. 또한 차 생산 시기에는 밤낮의 기온차가 커 차나무를 재배하는 데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또한 토양은 약산성으로 수분이 충분하며 자갈이 많은 사력질 토양으로 차나무 생육에 좋아 차나무 재배에 알맞은 토질을 갖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요인을 활용하여 2003년에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지정하는 지리적 표시제에 하동녹차를 등록하였다.
하동녹차는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녹차보다 성분, 맛과 품질 등 모든 면에서 우수하며, 특히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덖음’ 기술이 특기할 만하다. 이를 활용하여 고급 녹차를 생산함으로써 보급형 녹차를 생산하는 다른 지역과의 차별화를 내세우고 있다. 실제로 우전, 세작, 중작, 대작 등 고급 녹차의 생산량이 전체 생산량의 95%를 차지하는 반면, 티백과 같은 보급 녹차의 생산량은 5%에 불과하다.
현황(관련 사업 포함)
야생 다원에서 생산되는 하동녹차는 차 재배에 유리한 기후 조건과 다른 지역과의 차별화를 통한 세계적 명품화를 추진하고 있다. 하동녹차의 명품화를 위해 하동녹차연구소, 차문화센터, 녹차체험관, 녹차 산업 전담 부서[지역특화산업기획단]가 설치되어 있다.
특히 하동 야생차 문화 축제는 지역에 국한된 문화 축제가 아닌 전 세계적인 축제로 발전하여 하동을 세계적인 녹차 산업의 중심지로 부각시켰다. 우리나라 차의 시배지이며 차 문화의 기원지로서 하동의 이미지를 홍보하고 관광객들에게 녹차와 관련된 정보와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녹차 생산 과정[찻잎 따기, 덖음]을 관광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녹차 체험 마을을 조성하는 등 대중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동군은 차 시배지이면서 ‘야생차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녹차 생산이 농가의 주 소득원이 되고 있다. 2008년 기준으로 농가 수 2,100호[전국 대비 약 45%], 재배 면적 1,048㏊[전국 대비 약 23%], 생산량 2,230톤, 소득원은 261억 원이다. 하동녹차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수입 개방 대비 차 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으로 친환경 유기농다원을 조성하였고, 생산비 절감 방안으로 하동군에서 채엽 장비를 지원하였다. 또한 생산성 향상을 위하여 관수 시설, 잡초 방제 부직포, 모노레일 설치를 지원하였다.
생엽에서 제품까지 안정성 확보 및 고품질 녹차 생산을 위해 하동녹차연구소, 농산물품질관리원과 협약을 체결하여 녹차 생산 전필지 유해 물질 안정성 검사를 실시하여 유해 물질 불검출의 성과를 거두었다. 녹차 참숭어, 녹차 냉면, 녹차 소주 등 녹차를 이용한 먹을거리도 다양하게 생산하고 있다.
2012.05.02(수) ~ 05.06(일) 5일간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악양면 일원에서 제17회 야생차문화축제(최우수 축제로 선정)를 한다고 하니
평소 하동녹차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참가하면 유익한 시간이 될거 같다.
버스 출발
PM 05:04
대전 롯데 하차
PM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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