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등반사 100대 사건
정리/로제 프리종-로슈 & 실벵 주티
번역/심 산
로제 프리종-로슈(Roger Frison-Roche)와
실벵 주티(Sylvain Jouty)가 함께 쓴
세계적 명저 <세계등반사(A History of Mountain Climbing)>
(Flammarion, 1996)의 부록으로 편찬된
<세계등반사 100대사건>을 번역·소개한다.
로제 프리종-로슈는 산악인 겸 탐험가이자 산악문학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고
등반사학 분야에서는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며,
실벵 주티 역시 저명한 산악잡지의 편집장으로서 등반사에 정통한 인물이다.
다만, 저자 두 사람이 모두 프랑스인이다 보니
정리 자체가 지나치게 프랑스 중심 내지
유럽 중심으로 치우쳐져 있다는 비난을 면키는 어렵다.
이 때문에 번역에 임하면서 내심 불만스러웠던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나,
원저자의 뜻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역자의 도리라고 판단하여,
일단 원문에 쓰여진 표현들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겼다.
다소 편파적인 기술에도 불구하고 세계등반사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 본다.
인명과 봉명은 처음 등장할 때에 한하여 원문과 병기하였다
오역이 발견된다면 역자에게 통고해주기 바란다
633년
일본의 승려 엔노 쇼샤쿠가 일본 최고봉인 후지산(Mount Fuji, 3776m)에 오르다.
이 쾌거는 최초의 고산등반으로 기록된다.
1334년-1336년
철학자 장 뷔리당(Jean Buridan)과 시인 페트라르슈(Petrarch)가
몇 년의 간격을 두고 프랑스 남부의 몽방투(Mont Ventoux, 1909m)에 오르다.
장 뷔리당은 우주론적 관심, 페트라르슈는 철학적 관심 때문이었다.
1358년
보니파스 로타리오(Boniface Rotario)가 로슈멜롱(Rochemelon, 3537m)에 오르다.
알프스 지역에서 행해진 최초의 3000m급 등반으로 기록되며,
훗날 순례의 대상지가 된다.
1400년경
잉카족들이 룰라이라코(Llullailaco, 6723m)를 비롯한
안데스 산맥의 여러 봉우리에 올라 유적과 미이라를 남기다.
세로 아콩카구아(Cerro Aconcagua)도 이 당시에 등반된 듯하다.
이 정도 고도의 등반은 1855년에 이르러서야
근대 등반가들에 의하여 다시 이루어진다.
1492년
앙투안 드 빌(Antoine de Ville)과 그의 동료들이 프랑스 왕의 명령에 따라
몽떼귀 (Mont Aiguille, 2806m)에 오르다. 사다리와 로프 등
등반기구들을 사용하여 험봉에 오른
최초의 "기술적인(technical)" 등반으로 기록된다.
1582년
에드문드 스코리(Edmund Scory)가 당시까지
"지구 위의 가장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던
카나리제도의 테네리페봉(Tenerife Peak,
현재의 이름은 타이디봉 Teide Peak, 3176m)에 오르다.
비록 실제로 가장 높은 곳은 아니지만
이 등반은 여론에 적지 않은 파문을 던졌다.
1648년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친척인 플로렝 페리에(Florin Perrier)가
기압을 측정하기 위하여 퓌드돔(Puy de Dme, 1465m)에 오르다.
기압계의 발명은 고도와 그것의 영향에 대한 관심을 점차로 증폭시켰다.
1738년 7월 20일,
부귀에(Bouguer)와 라 콩다민(La Condamine)이
에쿠아도르의 코라존(Corazon, 4791m)에 오르다.
그들은 "역사상 그 누구도 우리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해발 4814m까지 올라갔다."고 말했다.
1770년
뒬뤽(Duluc) 형제들이 기후에 대한 연구를 위하여
몽뷔에(Mont Buet, 3109m)에 오르다.
고소에서 행해진 최초의 비박으로도 기록된다.
1778년
그레소니의 주민들이 "잃어버린 계곡(Lost Valley)"을 찾기 위하여
몬테 로사의 사면에 있는 엔덱쿵스펠젠(Entdeckungsfelsen, 4366m)에 오르다.
알프스 지역에서 행해진 최초의 4000m급 등반으로 기록된다.
1779년
"동부 알프스의 소쉬르"라고 불리우는 벨사자르 아케(Belsazar Hacquet)가
오스트리아-이탈리아-슬로베니아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쥘리앙 알프스의 최고봉 트리글라브(Triglav, 2863m)에 오르다.
1786년
샤모니 출신의 자크 발마(Jacques Balmar)와
미셸 가브리엘 파카르(Michel Gabriel Paccard)가 몽블랑을 초등하다.
이들의 등반에 동기를 부여했던 제네바의 과학자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Horace B n dict de Saussure)도
그 이듬해에 몽블랑에 오른다.
1799년
폰 살름 추기경(Cardinal von Salm)이 그의 측근들과 함께
동부 알프스의 실질적인 최고봉인 클라인글로크너(Kleinglockner, 3783m)에 오르다.
이듬해에는 그로스글로크너(Grossglockner, 3798m)도 등반되었다.
1802년
라몽 드 카르보니에르(Ramon de Carbonni res)가
가이드인 론도(Rondo) 및 로렌스(Laurens)와 함께
피레네 산군의 몽페르뒤(Mont Perdu, 일명 몬테페르디토 Monte Perdito, 3353m)에 오르다.
바야흐로 프랑코-스페인 지역의 등반이 개시된 것이다.
1803년
독일의 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가
고산병의 증세에 대하여 연구하기 위하여
에쿠아도르에 있는 침보라초(Chimborazo)산의 5800m 지점까지 오르다.
1811년
스위스 아라우 지방의 메이어(Meyer)형제가
뢰첸탈에서 온 두 명의 영양사냥꾼들과 함께
베르네제 오버란트의 융프라우(Jungfrau)를 초등하다.
1820년
에드 제임스(Ed James)와 그의 동료들이 파이크스봉(Pikes Peak, 4310m)에 오르다.
로키산맥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고산등반으로 기록된다.
1829년
엠마누엘 장군(General Emanuel)이 이끄는 러시아과학자원정대가
코카서스의 엘브루즈(Elbrus)에 오르다.
지질학자인 렌즈(Lenz)와 쿠퍼(Kuppfer)는 정상을 200m 앞두고 돌아섰지만,
체르케스크 출신의 킬라 하시로프(Killar Hashirov)는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1829년
프란츠 요셉 휴기(Franz Joseph Hugi) 교수가
가이드인 야콥 로이톨트(Jakob Leuthold) 및 요하네스 베렌(Johannes W hren)과 함께
베르네제 오버란트의 최고봉인 핀스테라호른(Finsteraarhorn, 4275m)에 오르다.
1830년
뒤랑(Durand) 대위가 군사적 목적의 정찰을 위해
영양사냥꾼인 마테오(Math oud) 및 리오타르(Liotard)와 함께
몽펠부(Mont Pelvoux, 3946m)에 오르다.
1850년
요한 코아즈(Johann Coaz)가 알프스의 4000m급 봉우리인
피즈 베르니나(Piz Bernina, 4055m)에 오르다.
1855년
제임스와 크리스토퍼 스마이드 형제(James and Christopher Smyth),
찰스 허드슨(Charles Hudson), 존 버벡(John Birbeck), E. J. 스티븐슨(E. J. Stevenson)이
가이드인 울리히 라우어너(Ulich Lauerner), 요한 춤타우그발트(Johann Zumtaugwald),
마티아스 춤타우그발트(Mattias Zumtaugwald)와 함께
몬테로사의 최고봉인 두푸르스피체(Dufourspitze, 4638m)에 오르다.
1861년
존 틴달(John Tyndall) 교수가 가이드인 요한-요세프 베넨(Johann-Josef Bennen) 및
울리히 벤거(Ulich Wenger)와 함께 발레 알프스의 고봉인
바이스호른(Weisshorn, 4512m)에 오르다.
1864년
A. W. 무어(A. W. Moore)와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가
가이드인 미셸 크로즈(Michel Croz) 및
크리스티앙 알머(Christian Almer) 부자(父子)와 함께
바르 데 제크렝(Barre des Ecrins, 4101m)에 오르다.
1865년
에드워드 윔퍼, 프랜시스 더글러스 경(Lord Francis Douglas), 찰스 허드슨,
로버트 해도우(Robert Hadow)가
가이드인 미셸 크로즈 및 페터 타우그발더(Peter Taugwalder) 부자와 함께
마터호른을 초등하다.
하산 도중 더글러스, 해도우, 크로즈, 허드슨이 죽음에 따라
여론으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1875년
헨리 코디어(Henri Cordier), 토마스 미들모어(Thomas Middlemore),
존 오클리 몬드(John Oakley Maund)가 가이드인 야콥 안데레그(Jakob Anderegg),
요한 야운(Johann Jaun), 안드레아스 마우러(Andreas Maurer)와 함께
에귀베르트(Aiguille Verte, 코르디에 쿨루아르 Cordier Couloir)의 북벽에 오르다.
이 루트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험난한 곳이어서 1924년에 이르러서야 재등된다.
1877년
엠마뉘엘 브왈로 드 카스텔노(Emmanuel Boileau de Castelnau)가
가이드인 피에르 가스파르(Pierre Gaspard) 부자와 함께
알프스에 남겨진 마지막 처녀봉 메이에(Meije, 3983m)에 오르다.
1880년
에드워드 윔퍼가 안데스의 침보라초(6272m)에 오름으로써
유럽 이외의 지역에 대한 등반의 물꼬를 트다.
1882년
셀라(Sella) 형제가 당뒤제앙(Dent du G ant)에 오르다.
이곳은 일찍이 머메리(Mummery)가
"정당한 방법으로는 오를 수 없는(inaccessible by fair means)" 곳이라고 선언했던 곳이다.
셀라 형제는 마키냐즈(Maquignaz)의 도움으로 케이블과 로프를 이용하여 이곳에 올랐는데,
이후 등반에서 "정당한 방법(fair means)"이란 과연 무엇이냐 하는 화두를 남겼다.
1885년
H. 세이무르 왕(H. Seymour King)이 가이드인 에밀 레이(Emile Rey),
앙브로스 쉬페르삭소(Ambros Supersaxo), 알로이스 앙타마탕(Aloys Anthamatten)과 함께
몽블랑에 남아있던 최후의 독립봉
에귀블랑슈 드 포이트레이(Aiguille Blanche de Peuterey)에 오르다.
1897년
빌헬름 파울케(Wilhelm Paulcke), 빌헬름 로뮐러(Wilhelm Lohm ller)와
그들의 동료들이 등반에서 최초로 스키를 사용하다.
이들은 그림셀에서 벨랄프까지 오버란트를 가로질러 간 다음
융프라우 사면에 있는 3780m까지 올랐다.
1898년
가이드인 마티아스 추르브리겐(Matthias Zurbriggen)이
아메리카 대륙의 최고봉인 아콩카구아(Aconcagua, 6960m)를 단독등반하다.
1899년
오토 암페러(Otto Ampferer)와 칼 베르거(Karl Berger)가
브렌타 돌로미테의 캄파닐레 바소(Campanile Basso, 2877m)에 오르다.
당시로서는 가장 난이도가 높은 등반이었다.
1903년
게오르그 로이히(Georg Leuchs), 한스 판(Hans Pfan), 루드비히 디스텔(Ludwig Distel)이
코카서스에 있는 우슈바(Ushba, 4698)의 두 봉우리를 최초로 연속등반(종주등반)하다.
적어도 네 번 이상의 비박을 감행하며 엄청난 시간을 소요한 등반이었다.
1904년
구스타프 하슬러(Gustav Hasler)와 프리츠 아마터(Fritz Amatter)가
두 번의 비박을 감행하며 핀스테라호른의 북벽에 오르다.
이로써 알프스의 북벽시대가 개막된다.
1906년
아브루치(Abruzzi) 공작이 이끄는 원정대가
아프리카의 루웬조리(Ruenzori, 달의 산 Mountains of the Moon이라고 불리운다)
지역에 들어가 최고봉인 마게리타(Margherita, 5119m)를 비롯한
19개의 봉우리에 오르다.
재등은 20년 후에 이루어진다.
1906년
발렌타인 라이언(Valentine Ryan)이
가이드인 프란츠와 요세프 로크마터(Franz and Joseph Lochmatter)와 함께
에귀뒤플랑(Aiguille du Plan)의 동쪽 릿지를 오르다.
세계대전 이전의 시기에 가장 험난한 것으로 꼽히던
암벽등반 루트들 중의 하나이다.
1907년
톰 롱스태프(Tom Longstaff)가
가이드인 알렉시스와 앙리 브로슈렐(Alexis and Henri Brocherel),
포터 카비르(Kabir)와 함께 가르왈 히말라 야에 있는 트리슐(Trisul, 7120m)에 오르다.
최초의 7000m급 등반으로 기록된다.
1909년
아브루치 공작이 이끄는 카라코람 원정대는 K2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브로드피크(Broad Peak, 초골리사 Chogolisa)의 7500m 지점까지 오르다.
당시까지 등반가들이 오른 최고의 고도였다.
1910년
피터 앤더슨(Peter Anderson), 윌리엄 테일러(William Taylor),
찰스 맥거너걸(Charles McGonagall)이 맥킨리(McKinley)의 북봉(6187m)에 오르다.
이들은 세칭 "탐광자(探鑛者, sourdoughs)"라고 불리우던
알래스카의 금광채굴업자들이었는데
맥킨리의 주봉(6194m)에도 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등반이었다.
1911년
귀도와 막스 메이어(Guido and Max Meyer)가
가이드인 안젤로 디보나(Angelo Dibona)와 함께
랄리데레반트(Lalidererwand, 카르벤델 Karwendel)의 북벽에
피톤을 박아가며 루트를 내다.
알프스의 벽에 피톤이 사용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1911년
뮈니히의 파울 프로이스(Paul Preuss)가 브렌타에 있는 캄파닐레 바소의 동벽을
로프를 쓰지 않고 두 시간만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하다.
이후 이탈리아의 등반가인 피노 프라티(Pino Prati)가 재도전에 나섰으나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루트는 1928년에 이르러서야 로프를 갖춘 등반대에 의해 재등된다.
1912년
한스 뒬퍼(Hans D lfer)와 발터 샤르슈미트(Walter Schaarsschmidt)가 피톤,
카라비너, 이중 로프, 펜듈럼 등 현대 등반의 모든 테크닉을 총동원하여
플라이슈방크(Fleischbank, 카이저게비르게 Kaisergebirge)의 동벽에 오르다.
이들은 드릴도 지참했으나 사용하지는 않았다.
1922년
조지 말로리(George Mallory)와 테오도르 소머벨(Theodore Somervell)이
산소 없이 에베레스트 북벽의 8230m까지 도달함으로써
당시까지의 고도기록을 깨다.
8000m 위로 올라간 최초의 기록이다.
조지 핀치(George Finch)와 찰스 브루스(Charles Bruce)가
산소통을 사용하여 8326m까지 올라가다.
1924년
말로리와 어빈(Irvine)이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가던 중
8500m 지점에서 실종되다.
등반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사건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과연 정상 등정에 성공했는가의 여부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확실한 증거도 제출되지 못하고 있다.
에드워드 노튼(Edward Norton)은 산소통을 사용하여 8326m까지 올라가다.
1925년
에밀 솔레더(Emil Solleder)와 구스타프 레텐바우어(Gustav Lettenbauer)가
1000m 당 15개의 피톤을 사용하여 푼타 치베타(Punta Civetta)의 북벽에 오르다. "
현대(modern)" 등반 초기의 쾌거로 꼽힌다.
1927년
저명한 가이드 아돌프 레이(Adolphe Rey)가 3개의 피톤을 사용하여
(카라비너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랑드 조라스(Grandes Jorasse)의
이롱델 릿지(Hirondells Ridge)에 오르다.
귀스토 게르바수티(Giusto Gervasutti)는 이 루트를 6급으로 판정했다.
1928년
미국의 로버트 언더힐(Robert Underhill)과 미리엄 오브라이언(Myriam O'Brien,
이 두 사람은 이후 결혼한다)이 가이드 아르망 샤를레(Arman Charlet) 및
조르주 카샤(Georges Cashat)와 함께 에귀뒤디아블(Aiguille du Diable)을
최초로 연속등반하다.
아르망 샤를레는 이 '이졸레 파사쥬(the Isolee Passage)'를 개척하면서
피톤을 사용하지 않았다.
1929년
미국의 브래포드 워쉬번(Braford Washburn)이 가이드인 조르주 샤를레(George Charlet),
알프레드 쿠테(Alfred Couttet), 앙드레 드부아수(Andr Devouassoux)와 함께
에귀베르트 북벽의 쿠튀리에 쿨루아르(Couturier Couloir)에 오르다.
1932년에는 마스셀 쿠튀리에(Marcel Couturier) 박사가 가이드인 아르망 샤를레 및
쥘 시몽(Jules Simond)과 함께 보다 직등에 가까운 루트로 재등했다.
1930년
칼 브렌델(Karl Brendel)과 헤르만 샬러(Hermann Schaller)가
에귀누아르 드 포이트레이(Aiguille Noire de Peuterey)의 남쪽 릿지를 오르다.
일찍이 빌로 벨첸바흐(Willo Welzenbach)도 도전했었으나 실패했던 곳이다.
1931년
에릭 쉽튼(Eric Shipton), 프랭크 스마이드(Frank Smythe),
R. L. 홀스워드(R. L. Holdsworth)와 셀파 레와(Lewa)가
가르왈 히말라야의 카메트(Kamet, 7755m)에 오르다.
당시까지 오른 가장 높은 고도의 봉우리였다.
중요한 초등기록에 셀파가 낀 첫 번째 경우이기도 하다.
1931년
슈미드(Schmid) 형제가 마터호른의 북벽을 오르다.
이들은 뮈니히에서 자전거를 타고 왔다고 한다.
1933년
에밀리오 코미치(Emilid Comici)와 디마이(Dimai) 형제가 80개의 피톤을 사용하여
돌로미테의 치마그란데 디 라바레도(Cima Grande di Lavaredo) 북벽에 오르다.
1935년
피에르 알렝(Pierre Allain)과 레이몽 레닝거(Raymond Leininger)가
서부 알프스 지역에서 가장 험난한 루트로 꼽히던 프티드뤼(Petit Dru) 북벽에 오르다.
루트명은 '알렝 피쉬르(Allain Fissure)'이다.
1935년
리카르도 카신(Ricardo Cassin)과 비토리오 라티(Vittorio Ratti)가 3일 동안
50개의 피톤을 사용하면서
돌로미테의 치마오베스트 디 라바레도(Cima Ovest di Lavaredo) 북벽에 오르다.
오버행이 연속되어 있는 곳에서 아찔한 트래버스를 계속해야되는 등반이었다.
1936년
노엘 오델(Noel Odell)과 빌 틸맨(Bill Tilman)이 난다 데비(Nanda Devi, 7817m)에
오름으로써 인간이 오른 최고봉의 고도기록을 경신하다.
1936년
양대 세계대전의 사이에 두 개의 어려운 루트가 개척되다.
지오반바티스타 비나체(Giovanbattidta Vinatzer)와 에토레 카스틸리오니(Ettore Catiglioni)가
24시간만에 마르몰라다(Marmolada)에 오르고,
레이문드 쉰코(Raymund Schinko)와 프리츠 시코로프스키(Fritz Sikorovky)가 4일만에
오스트리아 게자우세에 있는 루스쿠페와 다클 사이의 데스 코너(Death Corner)에 오르다.
1938년
알프스에 남아있던 두 개의 최난코스가 해결되다.
아이거 북벽은 두 팀에 의하여 등반되었다.
안데를 헤크마이어(Anderl Heckmair)-루드비히 뵈르그(Ludwig V rg) 팀과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프리츠 카스파레크(Fritz Kasparek) 팀이다.
이탈리아의 리카르도 카신, 우고 티조니(Ugo Tizzoni), 지노 에스포지토(Gino Esposito)가
그랑드 조라스의 포인트 워커(Pointe Walker) 북벽에 오르다.
1950년
모리스 에르족(Maurice Herzog)과 루이 라슈날(Louis Lachenal)이
최초의 8000m봉인 안나푸르나(Annapurna)에 오르다.
그러나 이들은 심각한 동상에 걸려 손발을 잘라내며 가까스로 탈출하였다.
1950년
앨런 스텍(Allen Steck)과 존 살라테(John Salath )가 오랜 노력 끝에
요세미테의 센티널 록(Sentinel Rock) 북벽에 오르다.
이 등반에는 4일이 소요되었으며 최후의 500m에서는
150개의 피톤과 9개의 익스펜션 볼트가 사용되었다.
요세미테 최초의 "거벽(big wall)" 등반으로 기록된다.
1951년
월터 보나티(Walter Bonatti)와 루치아노 기고(Luciano Ghigo)가
서부 알프스 지역에서 발전을 거듭한 새로운 피톤 테크닉으로
몽블랑 지역의 그랑카퓌셍(Grand Capucin) 동벽에 오르다.
1952년
파리 출신의 등반팀인 아드리앙 다고리(Adrien Dagory),
뤼시앙 베라르디니(Lucien B rardini), 귀도 마뇬(Guido Magnone),
마르셀 라이네(Marcel Lain )가 프티드뤼 서벽에 오르다.
일찍이 1935년 피에르 알렝(Pierre Allain)이
"등반 불가능한 곳의 전형(the very prototype of the impossible)"이라고 했던 곳이다.
1952년
프랑스원정대의 귀도 마뇬과 리오넬 테레이(Lionel Terray)가
파타고니아의 피츠로이(Fitz Roy, 현재는 샬텐 Chalt n, 3405m)를 오르다.
1953년
두 개의 8000m봉이 정복되다.
존 헌트(John Hunt)가 이끄는 영국원정대 소속의 두 명의 클라이머-
뉴질랜드의 에드문드 힐러리(Edmund Hillary)와
셸파 텐징 노르게이(Tenzing Norgay)가 에베레스트(Everest)에 올랐고,
헤르만 불(Hermann Buhl)이 극한적인 단독등반으로
낭가 파르바트(Nanga Parbat)에 올랐다.
1954년
아르디토 데시오(Ardito Desio)가 이끄는 이탈리아원정대 소속의
아킬레 콩파뇨니(Achille Compagnoni)와 리노 라세델리(Lino Lacedelli)가
세계 제2봉인 K2(8611m)에 오르다.
월터 보나티와 포터인 마디(Mahdi)는 아무런 도구도 없이
8000m 부근에서 비박을 감행했다.
1954년
뤼시앙 베라르디니, 로베르 파라고(Robert Paragot), 에드몽 드니(Edmond Denis),
아드리앙 다고리, 귀 풀레(Guy Poulet), 피에르 르쉬에르(Pierre Lesueur)가
아콩카구아 남벽에 오르다.
이들 중 몇 명은 동상에 걸렸다.
1955년
월터 보나티가 5일만에 프티드뤼의 남서 필라를 오르는 쾌거를 이룩하다.
1955년
모리스 다바유(Maurice Davaille)와 필립 코르뉘오(Philippe Cornuau)가
5일만에 레드루아트(Les Droites) 북벽에 오르다.
이 등반은 당시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1957년
해미쉬 맥킨스(Hamish MacInnes), 톰 페이티(Tom Patey), G. 니콜(G. Nicol)이
벤 네비스의 제로 걸리(Zero Gully)를 오르다.
영국 빙벽등반의 위대한 성취이다.
1957년
월터 필립(Walter Phillipp)과 디이터 플램(Dieter Flamm)이
오랫동안 돌로미테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로 여겨지던
푼타치베타의 북서 디에드럴에 오르다.
1958년
워렌 하딩(Warren Harding), 조지 휘트모어(George Whitmore), 웨인 메리(Wayne Merry),
앨런 스텍 등이 요세미테 엘 캐피탄(El Capitan) 최초의 루트인 노즈(Nose)를 개척하다.
18개월에 걸친 도전 끝에 45일만에 이루어진 등반이며,
675개의 피톤과 125개의 볼트가 사용되었다.
1958년
로타르 브랜들러(Lothar Brandler)와 디트리히 하세(Dietrich Hasse)가
돌로미테의 치마그란데 북벽에 오르다.
중앙의 거대한 오버행을 직등하는 루트였다.
1961년
토니 히벨러(Tony Hiebeler), 발터 알름베르거(Walter Almberger),
토니 킨스호퍼(Toni Kinshofer), 안데를 만하르트(Anderl Mannhardt)가
3월 6일부터 12일에 걸쳐 아이거 북벽을 동계초등하다.
1961년
벨기에의 클라우디오 바르비에(Claudio Barbier)가
돌로미테의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Tre Cime di Lavaredo) 5대북벽을 하루만에 단독등반하다.
치마오베스트는 카신루트, 치마그란데는 코미치루트, 치마피콜라는 프로이스루트,
치마피콜리시마는 뒬퍼루트, 푼타디 프리다는 이너코플러루트로 올랐다.
1962년
네팔 히말라야의 야누(Jannu, 쿰바카르나 Kumbhakarna, 7710m)가 정복됨으로써
"보다 낮지만 보다 어려운(less lofty but highly difficult)" 봉우리를 추구하는
히말라야 등반의 새로운 경향이 시작되었다.
1963년
발레 출신의 미셸 다르벨리(Michel Darbellay)가 아이거 북벽을 단독등반하다.
월터 보나티와 코시모 자펠리(Cosimo Zapelli)가
그랑드 조라스의 워커 스퍼를 동계초등하다.
1963년
톰 프로스트(Tom Frost), 스튜어트 풀턴(Stewart Fulton), 존 할린(John Harlin),
게리 헤밍(Gary Hemming)이 푸(Fou)의 남벽에 오름으로써 몽블랑 산군에 남아있던
마지막 처녀벽이 캘리포니아 클라이머들의 새로운 전략과 테크닉으로 정복되다.
1965년
월터 보나티가 마터호른 북벽을 동계단독직등으로 오르는 위업을 달성하다.
마터호른이 초등된지 100년만의 일이다.
1967년
스위스의 실벵 소당(Sylvain Saudan)이 평균 경사도가 51도에 이르는
에귀 드 블레티에르(Aiguille de Blaitiere)의 스펜서 쿨루아르(Spencer Couloir)를 스
키로 하강하다.
알 프스에서 이루어진 "극한 스키(extreme skiing)"의 시초로 기록된다.
1968년
르네 데메종(Ren Desmaison)과 로베르 플레마티(Robert Flematti)가
최고의 클라이머들이 수 년간 시도했으나
성취하지 못했던 그랑드 조라스의 슈루(Shroud)에 오르다.
1970년
크리스 보닝턴(Chris Bonington)이 이끄는 영국원정대가 안나푸르나 남벽에 오르다.
최초의 히말라야 거벽등반으로 기록된다.
1973년
월터 체시널(Walter Cecchinel)과 클로드 야거(Claude Jager)가
프티드뤼 북쿨루아르에 오르다.
4일이 소요된 이 등반은 12월 31일에 끝났다.
이런 등반이 가능했던 것은 체시널이 시몽사(the Simonds firm)를 위해 개발한
아이스액스와 크램폰 등 빙벽장비의 우수한 성능 덕분이다.
1974년
카시미로 페라리(Casimiro Ferrari)가 이끄는 이탈리아원정대가
"지구상에서 가장 어려운 봉우리"로 손꼽히던 세로 토레(Cerro Torre)에 오르다.
과거와는 달리 등정시비의 여지가 없는 최초의 완벽한 등반이었다.
1959년에 체사레 마에스트리(Cesare Maestri)와 토니 에거(Toni Egger)가
보고한 초등기록은 오랫동안 의심받아 왔었다.
토니 에거는 이때의 등반과정에서 사망했다.
1975년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와 페터 하벨러(Peter Habeler)가
히든피크(Hidden Peak)를 재등하면서 전혀 새로운 루트를 냈을 뿐 아니라
순수한 "알파인 스타일(Alpine style:고소포터, 중간캠프, 고정자일을 쓰지 않는 것)"로
올라감으로써 히말라야 등반의 새 시대를 열다.
1975년
크리스 보닝턴이 이끄는 영국원정대가 1968년부터 지속적으로 시도되었던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에 성공하다.
듀걸 해스턴(Dougal Haston)과 더그 스코트(Doug Scott)는
정상 등정을 마친 다음 남봉에서 비박하였다.
1976년
조 태스커(Joe Tasker)와 피터 보드맨(Peter Boardman)이
가르왈의 창가방(Changgabang, 6864m) 서벽에 오름으로써
히말라야 등반의 난이도를 높이다.
1978년
라인홀트 메스너와 페터 하벨러가 최초로 산소 없이 에베레스트에 오르다.
1980년
안드레이 자바다(Andrzej Zawada)가 이끄는
폴란드원정대가 에베레스트를 동계초등하다.
1980년
라인홀트 메스너가 북벽을 통하여, 산소없이, 에베레스트를 단독등반하다.
불과 10년전만 하더라도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쾌거였다.
1981년
체코의 이고르 콜러(Igor Koller)와 얀드리히 수스트르(Jndrich Sustr)가
마르몰라다에 "트래버스 르 프아송(A Traverse le Poisson)"이라는
고난도의 새루트를 내다.
1983년
알프스에 자유등반의 바람이 불다.
스위스의 마르코 페드리니(Marco Pedrini)는 드뤼의 "수퍼디렉트(superdirect)"를
너트만을 사용하여 자유등반했고,
프랑스의 에릭 에스코피에(Eric Escoffier)는 푸 남벽을 자유등반했다.
1984년
라인홀트 메스너와 한스 카머란더(Hans Kammerlander)
최초로 8000m봉 2개를 연속등반하다.
이들은 4일만에 히든 피크와 가셔브룸2에 올랐다.
1984년
노르웨이의 한스 크리스천 돈세트(Hans Christian Donseth), 핀 돌리(Finn Doehli),
다그 콜스루드(Dag Kolsrud), 스테인 아세임(Stein Aasheim)이
20일에 걸쳐 그레이트 트랑고 타워(Great Trango Tower) 동봉 남서벽에
"노 리턴(No Return)"이라는 루트를 개척하다.
하강 도중 2명의 클라이머가 숨졌다.
히말라야 등반이 보다 더 높은 난이도로 옮겨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1985년
보이테크 쿠르티카(Wojtech Kurtyka)와 로버트 샤우어(Robert Schauer)가
가셔브룸4 서벽에 오르다.
현대등반사에서 가장 용감한 등반들 중의 하나로 꼽혀야 마땅하나,
가셔브룸4와 클라이머들이 모두 무명이었다는 이유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86년
라인홀트 메스너가 마지막으로 로체에 오름으로써 인류 최초로
8000m급 14좌를 모두 오른 인물이 되다.
14좌는 다음과 같다:안나푸르나, 브로드피크, 초오유, 다울라기리, 에베레스트,
가셔브룸2, 히든피크, K2, 칸첸중가, 로체, 마칼루, 마나슬루, 낭가파르바트, 시샤팡마.
1989년
슬로베니아의 토모 체센(Tomo Cesen)이 야누 북벽과 로체 남벽을 초등하다.
그러나 이 등반의 진위여부를 놓고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
1991년
프랑스의 여성산악인 카트린느 데스티벨(Catherine Destivelle)이
9일만에 프티드뤼를 새로운 루트로 개척등반하다.
1991년
헝가리의 페터 데카니(Peter D k ny)와 아틸라 오스바트(Attila Ozsv th)가
탈레이사가르(Thalay Sagar, 6904m) 북벽에 오르다.
탈레이사가르는 가르왈 히말라야에서 가장 어려운 봉우리들 중 하나로 꼽히며,
지구 전체를 놓고 보아도 세로 토레와 더불어 가장 어려운 봉우리로 꼽힌다.
1993년
미국의 린 힐(Lynn Hill)이 엘 캐피탄의 노즈를 자유등반으로 오르다.
세계 최강의 남성 클라이머들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1995년
영국의 앨리슨 하그리브스(Alison Hargreaves)가
여성 최초로 산소 없이 에베레스트에 오르다
그녀는 몇 달 후 K2에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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