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해외원정등반 조난약사
인간은 언제부터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산을 올랐을까?
서구의 근대 등산은 1786년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4,807m) 초등으로 시작되었다.
1865년 마터호른(4,478m) 등정으로 알프스 시대를 마감하고,
1895년 머메리의 낭가파르밧 도전으로 불붙기 시작한 히말라야 등반은
8,000m급 14개 봉우리가 완등되는 1964년을 기점으로
등정주의에서 등로주의로 발전되었다.
우리나라의 근대 등산은 1931년 조선산악회(일본인 중심),
1937년 백령회, 1945년 한국산악회, 1962년 대한산악연맹의 탄생으로 발전하여 왔다.
1962년 경희대산악회의 히말라야 첫 원정 등반을 시작으로
41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 해외 원정 등반은
히말라야, 알프스, 맥킨리, 아콩카구아, 요세미터 등으로 폭이 넓어져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8,000m급 14개 봉우리를 모두 오른 산악인을
3명이나 배출하는 최초의 국가로 성장하였다.
산을 오르다 보면 예기치 못한 조난(산악 사고)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다.
조난의 원인은 크게 자연적인 것(눈사태, 낙뢰, 눈 처마, 낙석, 폭설 등)과
인위적인 것(등반자의 잘못이나 실수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의 경우 사고의 원인이 뚜렷하나 후자의 경우 사고의 원인이 명확치 못하여
추정이나 추론으로 사고원인을 파악할 뿐이다.
산에서 발생한 대형 조난(산악 사고) 사고는
1990년 구 소련 파미르 국제캠프에서 눈사태로 인한 40명의 희생,
독일 원정대의 1937년 낭가파르밧에서 눈사태로 16명 희생(대원 7, 셀파 9명),
1972년 마나슬루에서 우리나라 원정대의 눈사태로 인한 15명의(대원 5, 셀파 10명) 희생 등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대한민국 원정대는 1962년부터 2003년까지 원정 등반 중 조난(산악 사고)으로 86명이 죽었다.
사고 원인이야 어떻든 머나먼 이국 땅에 묻혀있을 님들의 이름과
발자취를 더듬어 보자는 의미에서 이미 언론에(월간 山, 사람과 山, 이미운틴, 신문 등)
발표된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하였다.
혹 누락된 원정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이해 바라며,
조난(산악 사고)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경우 로서 우리나라 사람만 기록하였으나,
트레킹이나 동남아(일본, 대만 등) 등반 중 조난(산악 사고)사고는 제외하였다
※ 사망자 연령별 분류
연령별 |
10대 |
20대 |
30대 |
40대 |
50대 |
60대 |
기타 |
계 |
인원수 |
1명 |
52명 |
26명 |
1명 |
2명 |
1명 |
3명 |
86명 |
※ 사망자 지역별 분류
서울 |
부산 |
대구 |
인천 |
광주 |
울산 |
강원 |
경기 |
경남 |
경북 |
전남 |
충남 |
제주 |
계 |
39명 |
9명 |
10명 |
2명 |
2명 |
2명 |
1명 |
7명 |
5명 |
3명 |
1명 |
1명 |
4명 |
86명 |
※ 원정대 주최별 사망자 분류
주최팀 대학산악회 단위산악회 합동원정대 계 인원수 20명 38명 28명 86명
※ 원정대 지역별 사망자 분류
알프스 |
히말라야 |
북미 |
남미 |
계 |
14명 |
61명 |
8명 |
3명 |
86명 |
※ 사고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산
아이거 |
맥킨리 |
브로드피크 |
마나슬루 안나푸르나Ⅰ 푸모리 |
에베레스트 |
8명 |
7명 |
6명 |
5명 |
4명 |
※ 산악사고 원인별 분류
고산병 |
낙뢰 |
낙석 |
눈사태 |
동사 |
실종 |
추락 |
기타 |
계 |
3명 |
2명 |
2명 |
23명 |
4명 |
20명 |
30명 |
2명 |
86명 |
【히말라야지역 조난사 현황】
성명 |
나이 |
사고일 |
대상산 |
주최 |
사고원인 | |
김기섭 |
24 |
1971.5.4 |
마나슬루 8,163m |
전국합동대 |
추락 | |
김호섭 |
29 |
1972.4.10 |
마나슬루 8,163m |
전국합동대 |
눈사태 | |
송준행 |
32 | |||||
오세근 |
28 | |||||
박창희 |
32 | |||||
이정대 |
30 |
1981.7.15 |
바인트브락Ⅱ 6,960m |
서울 악우회 |
추락 | |
정양근 |
27 |
1983.9.24 |
안나푸르나 Ⅰ 8,091m |
서울 은벽산악회 |
눈사태 | |
김성규 |
26 |
1986.5.12 |
다울라기리 Ⅱ 7,751m |
대구 팔공산악회 |
실종 | |
이성호 |
35 |
1987.12.11 |
캉첸중가 8,586m |
부산 대륙산악회 |
콜레라(?) | |
권대식 |
24 |
1988.4.11 |
추렌히말 7,371m |
서울 중동산악회 |
추락 | |
장용일 |
37 |
1988.8.20 |
브로드피크 8,047m |
서울 악우회 |
추락 | |
하상원 |
26 |
1989.6.20 |
디란 7,257m |
울산산악회 |
눈사태 | |
이수희 |
27 | |||||
김광호 |
22 |
1989.6.23 |
낭가파르밧 8,125m |
전주대학교산악회 |
추락 | |
정재홍 |
62 |
1989. |
히말츄리 7,892m |
계명대학교산악회 |
고산병 | |
김용규 |
27 |
1989.9.21 |
안나푸르나 Ⅱ 7,937m |
영남대학교산악회 |
추락 | |
정갑용 |
26 | |||||
진교섭 |
27 |
1989.12.20 |
얄륭캉 8,505m |
대구 영남지봉산악회 |
실종 | |
정성백 |
28 |
1990.7.3 |
낭가파르밧 8,125m |
광주합동대 |
실종 | |
함상헌 |
27 |
1990.10.7 |
에베레스트 8,848m |
한일합동대(부산연맹) |
추락 | |
이상구 |
28 |
1991.9.19 |
안나푸르나 Ⅰ 8,091m |
대산련 인천연맹 |
눈사태 | |
이석주 |
26 | |||||
서성수 |
33 |
1992.5.12 |
푸모리 7,145m |
부산 빌라알파인클럽 |
실종 | |
김백균 |
25 | |||||
서영덕 |
23 | |||||
김영재 |
28 |
1992.7.26 |
루프가르사르동봉 7,200m |
전주 파이오니어스 |
눈사태 | |
정수근 |
25 | |||||
김준호 |
19 |
1992.9.16 |
푸모리 7,145m |
서울 뫼우리산악회 |
고산병 | |
김진현 |
27 |
1992.12.18 |
랑탕리룽 7,234m |
제주 설암산악회 |
눈사태 | |
안진섭 |
25 |
1993.5.15 |
사가르마타 8,848m |
서울 동국산악회 |
실종 | |
남원우 |
28 |
추락 | ||||
안춘문 |
26 |
1993.7.7 |
낭가파르밧 8,125m |
충남대 공대산악회 |
실종 | |
박병태 |
28 |
1993.9.29 |
시샤팡마 8,027m |
서울 거봉산악회 |
실종 | |
변준석 |
36 |
1994.12.7 |
안나푸르나 Ⅰ 8,091m |
대구영남지봉산악회 |
추락 | |
박현재 |
27 |
1995.7.12 |
브로드피크 8,047m |
광주·전남합동대 |
추락 | |
김재표 |
29 |
1995.7.24 |
티리치미르 7,708m |
대산련경기북부연맹 |
실종 | |
조준용 |
28 | |||||
최영환 |
32 |
1995.9.3 |
바기라티 Ⅱ 6,521m |
서울 하이얀산악회 |
눈사태 | |
임순택 |
25 |
1996.6.20 |
브로드피크 8,047m |
경희대학교산악회 |
실종 | |
한동근 |
30 | |||||
양재모 |
26 | |||||
김보현 |
33 |
1997.7.27 |
칸텡그리 7,010m |
문경눈내리는산마실 |
실종 | |
최병수 |
33 |
1997.9.10 |
초모랑마 8,848m |
대구 경북산악회 |
눈사태 | |
김여훈 |
25 |
1997.11.8 |
팡 7,647m |
강원대학교산악회 |
추락 | |
신상만 |
33 |
1998.9.28 |
탈레이사가르 6,904m |
대산련 경기북부지부 |
추락(?) | |
최승철 |
29 | |||||
김형진 |
26 | |||||
오종락 |
28 |
1998.11.14 |
미니아공가 7,556m |
대산련 전남연맹 |
추락 | |
지현옥 |
39 |
1999.4.29 |
안나푸르나 Ⅰ 8,091m |
한국-스페인합동대 |
실종 | |
허승관 |
26 |
1999.7.29 |
브로드피크 8,047m |
연세대학교산악회 |
실종 | |
한도규 |
36 |
1999.9.14 |
캉쳔중가 8,586m |
대한산악연맹 |
눈사태 | |
현명근 |
31 | |||||
이수호 |
35 |
2000.9.29 |
다울라기리 8,167m |
경남학생산악연맹 |
눈사태 | |
김지연 |
|
2001 |
푸모리 7,161m |
한국푸모리원정대 |
실종 | |
박영도 |
31 |
2001.7.22 |
K2 8,611m |
서울 동국산악회 |
추락 | |
김수야 |
34 |
2001.9.9 |
초오유 8,201m |
대산련 경북연맹 |
고산병 | |
박기정 |
51 |
2003.7.21 |
악수 5,239m |
서울산바라기산악회 |
추락 | |
최영선 |
33 | |||||
김선봉 |
|
2003.8.21 |
마체르모 |
성균관대학교산악회 |
낙석 | |
박주훈 |
35 |
2003.10.5 |
로체샬 8,400m |
대한산악연맹 |
눈사태 | |
황선덕 |
27 | |||||
계 |
61명 |
【알프스지역 조난사 현황】
성명 |
나이 |
사고일 |
대상산 |
주최 |
사고원인 |
신건호 |
29 |
1981.7.8 |
아이거 서릉 |
한국대학산악연맹 |
낙뢰 |
주동규 |
26 | ||||
배종순 |
38 |
1986.12.15 |
아이거 북벽 |
부산엑셀시오알파인클럽 |
실종 |
김원겸 |
31 | ||||
허종행 |
26 |
1988.7.30 |
아이거 북벽 |
동국대학교산악회 |
추락 |
신종득 |
25 |
1989.10 |
아이거 북벽 |
포항 향로산악회 |
|
오창해 |
28 |
1993.10.20 |
그랑드죠라스 북벽 |
대구 팔공산악회 |
눈사태 |
추민호 |
26 | ||||
이진욱 |
22 | ||||
전준수 |
39 |
1995.6.30 |
아이거 북벽 |
성남 푸른산악회 |
추락 |
김득기 |
26 |
1995.7.6 |
마터호른 북벽 |
서울 한얼산악회 |
추락 |
최 철 |
26 | ||||
김중광 |
|
2000.7.28 |
몽블랑 |
경남 진해산악회 |
동사 |
신문희 |
30 |
2002.8.13 |
아이거 서릉 |
성남 석우산악회 |
눈사태 |
계 |
14명 |
【기타지역 조난사 현황】
성명 |
나이 |
사고일 |
대상산 |
주최 |
사고원인 |
고상돈 |
30 |
1979.5.29 |
맥킨리 6,191m |
한국일보 맥킨리원정대 |
추락 |
이일교 |
24 | ||||
김용환 |
|
1981.1.18 |
아콩카구아 6,959m |
서울문리대OB산악회 |
추락 |
이영순 |
35 |
1987.8.6 |
요세미터 하프돔 |
한양대학교산악회 |
낙석 |
진성종 |
26 |
1992.5.20 |
맥킨리 6,191m |
제주대학교산악부 |
추락 |
양영수 |
29 | ||||
홍성탁 |
25 | ||||
김기원 |
27 |
1994.5.21 |
맥킨리 6,191m |
부산 상봉산악회 |
동사 |
이상명 |
25 | ||||
강준호 |
46 |
1998.1.2 |
아콩카구아 6,959m |
요산동우회 |
추락 |
박상석 |
58 |
1999.1.4 |
아콩카구아 6,959m |
관세청불규칙산악회 |
동사 |
계 |
11명 |
마나슬루(Manaslu 8,163m) 있는곳 네팔 히말라야 사고자 김기섭
서울신문사의 지원으로 전국합동대가 팀을 꾸려 김호섭 대장과 5명의 대원이
1월26일 선발대 출국에 이어 본대가 출국하여 3월31일 4,300m 베이스 캠프에
전 대원이 합류하여 C1(5,000m) 설치에 이어 C2(5,940m), 4월10일 C3(6,700m)를 설치하고
4월15일 7,100m까지 전진하여 C4를 세웠다.
그 후 날씨 악화로 대기하다 김호섭 대장과 동생 김기섭 대원이
5월4일 7,600m에 C5를 설치하고 나니, 날씨가 급변하여 돌풍이 몰아쳐,
김기섭 대원이 돌풍에 휘말려 40미터 아래의 크레바스에 추락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히말라야 조난사로 기록되었다.
마나슬루(Manaslu 8,163m) |
있는곳 |
네팔 히말라야 |
사고자 |
김호섭, 송준행, 오세근, 박창희 |
기록영화제작을 위해 일본인 야스히사 가스나리 와 기자 등
총 12명의 대원으로 출국하여 3월11일 마나슬루 빙하 상단 4,30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였다.
3월14일 등반을 개시한 원정대는 C1(5,200m), 3월22일 C2(6,000m), 3월27일 C3(6,500m),
4월7일 C4(7,250m)를 설치하고 등정 기회를 노렸으나
4월9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폭설로 변해 쉴새없이 내렸다.
4월10일 새벽 3시 폭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눈 더미가 3캠프(6.500m)를 덮쳐
6명의 대원과 12명의 셀파가 자고 있는 텐트 6동을 휩쓸어 버렸다.
밤에 제설 작업을 하던 셀파 2명과 김예섭 대원은 1,100m나 휩쓸렸으나,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고, 5명의 대원(일본인 1명 포함) 과 10명의 셀파 등
총 15명의 사람이 희생되었다.
바인트브락Ⅱ(Bainta Brakk 6,960m) |
있는곳 |
파키스탄 카라코람 히말라야 |
사고자 |
이정대 |
카라코람 비아퐁 빙하에 있는 바인트브락은 "사람 잡아먹는 귀신"이란 뜻의
오거(Ogr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산으로 주봉(7,285m)은
1977년 크리스 보닝턴이 이끄는 영국대에 의해 초등되었고
Ⅱ봉은 미등인 채로 남아있었다.
카라코람 지역으로 첫 원정대를 꾸린 서울 악우회(대장 심의섭)가 11명의 대원을 이끌고
빠른 템프로 등반을 하여 7월14일 6,300m 지점에 마지막 캠프를 설치하였다.
7월15일 이정대, 유한규 대원은 중앙벽으로 정상공격을 하여
12시 6,700m 지점의 설원을 트레버스 하여 6,900m까지 올랐으나
이정대 대원이 심한 고소증세를 보여 60여 미터를 남겨놓고 하산 중
6,700미터 지점의 꿀르와르를 안자일렌으로 통과 중 이정대 대원이 실족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자일을 당겼으나 매듭이 풀려 있었고 사람은 온데 간데 없었다.
함께 자일을 묶었던 유한규 대원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이정대 대원은 극도로 지쳐 있었어 나와 템포를 맞추기가 어려워
혼자서 천천히 내려오려고 줄을 풀었고
그 다음 탈진한 몸으로 몇 동작을 더 움직이다가
균형이 흐트러져 추락한 것으로 판단한다."
안나푸르나Ⅰ(Annapurna 8,091m) |
있는곳 |
네팔 히말라야 |
사고자 |
정양근 |
북쪽은 초등 된 루트이고 남쪽은 급경사의 벽으로 이루어져 1970년에야 개척되었다.
북쪽 루트는 지형 상 눈사태가 잦고 남벽 보다 위험해 많은 산악인들이 희생된 곳이기도 하다.
서울 은벽산악회가 원정대를 꾸려 안창렬 대장 외 9명의 대원이 7월4일 김포공항을 출국하였다.
9월2일 북면 4,30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네덜란드루트
즉 더치 립 코스로 등반을 속개해 9월4일 C1(5,000m), 9월6일 C2(5,400m), 9
월9일 C3(6,250m)까지 순조롭게 등반을 하였으나, 9월10일부터 많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어렵게 9월21일 4캠프까지 올라갔다.
다음날부터 3일간 폭설이 내려 9월24일 무게를 견디지 못한 상층부의 눈 더미가
2캠프를 덮쳐 정양근, 김청환 대원과 2명의 셀파를 덮쳤다.
이 눈사태로 김청환 대원과 한 명의 셀파는 극적으로 탈출하여 살아났고
정양근 대원과 셀파는 유명을 달리 하였다.
다울라기리Ⅱ(DhaulagiriⅡ 7,751m) |
있는곳 |
네팔 히말라야 |
사고자 |
김성규 |
다울라기리Ⅱ(7,751m)봉 동릉 루트로 등반을 하였다.
1차 공격 실패 후 5월12일 김성규 대원(대구대 사대 수학교육과)과 셀파 2명이
새벽 4시에 C3(6,900m)를 출발하여 오후 4시30분
정상에 올라 5분 정도 머물다 하산을 하였다.
하산은 사다 앙도로지, 김성규, 셀파 기빠 순으로 하였으나
C3에 셀파 만 돌아 왔을 뿐 김성규 대원은 보이지 않아 실종되었다.
실종 원인은 7,300m 지점에서 강풍으로 인해 실족하여
티벳쪽으로 추락된 것으로 추정된다.
캉첸중가(Kanchenjunga 8,586m) |
있는곳 |
네팔 히말라야 |
사고자 |
이성호 |
주봉 외에 서봉(8,505m 일명 얄륭캉), 중앙봉(8,473m), 남봉(8,491m)의
연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5년 영국대가 남서면으로 초등 한 이후 1978년 스페인대가 중앙봉을,
폴란드대가 남봉을 초등 하였다.
부산 대륙산악회는 동계 2등을 목표로 정상무 대장 외 8명으로
원정대를 구성하여 출국하였으나,
선편으로 보낸 원정화물 지연으로 선발대가 먼저 출발하여
12월10일 얄륭 빙하 위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후발대로 오던 이성호 대원이 카라반 도중 계속되는 설사와 혈변으로 쓰러져
카트만두로 후송하는 도중 사망했다.
확실한 사망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장티푸스나 콜레라로 추정된다.
그 후 등반을 계속하여 1988년1월2일 이정철 대원이 단독으로 8,586m 정상에 올랐다.
추렌히말(Churen Himal 7,371m) |
있는곳 |
네팔 히말라야 |
사고자 |
권대식 |
좌측부터 서봉, 중앙봉, 동봉으로 연결된 산으로 서봉과 동봉은 7,371m로 높이가 똑같다.
1970년 봄 김정섭 등반대가 동봉을 초등 하였으나,
같은 해 가을에 등반한 일본대가 이의를 제기하여
지금은 일본이 초등으로 되어 있는 츄렌히말을 1986년 도전에 이어 재 도전에 나선
서울 중동산악회는 지훈구 대장 외 5명의 대원이 3월26일 4,750m에 BC를 설치하였다.
셀파 없이 대원들의 힘으로 3월31일 C1(5,370m), 4월7일 C2(5,760m),
4월10일 C3(6,310m)를 설치하여 4월11일 신장섭, 권대식 대원이
짐 수송을 위해 내려가던 중 C2 부근에서 권대식 대원이 크레바스에 빠져 사망하였다.
사고가 난 3시간30분 후 전 대원이 구조작업에 나서
신장섭 대원이 크레바스 속으로 하강하여 들어가니 권대식 대원은 이미 죽어 있었고
그의 시신을 로프로 올려 보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사태 수습 후 등반을 속개하여 5월7일 10시20분
신장섭, 이흥식 대원이 서릉 루트로 동봉을 등정하였다.
브로드피크(Broad Peak 8,047m) 있는곳 파키스탄 히말라야 사고자 장용일
4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서울 악우회 브로드피크 원정대는
6월23일 출국하여 8월8일부터 15일까지 두 차려 등정을 노렸으나
강풍과 눈보라로 실패하고 C5(7,500m)에서 기상여건이 좋지 않아 4일간 머물다
8월20일 새벽 2시10분 3명의 대원은 정상을 향해 출발하였다.
많은 눈이 쌓여있어 힘든 러셀로 오후 2시35분 무산소로 3명의 대원은 정상에 올라
(나중에 10여일 먼저 브로드피크 정상에 오른 일본대가
악우회의 등정 의문을 제기하여 확인 결과 전위봉으로 판명됨)
20분 정도 전위봉에 머물다 장용일 대장, 한윤근, 신한철 대원 순으로 하산을 하여
1시간 정도 내려왔을까?
신한철 대원은 주봉에서 전위봉으로 막 내려서려는 지점인 주봉의 능선 상에 있었고,
한윤근 대원은 그 사이의 안부로 내려가 보이지 않은 상태였다.
장용일 대장은 전위봉 부근에서 눈 처마가 붕괴되면서
중국쪽으로 3,000m 수직 벽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불과 50m 떨어져 있는 신한철 대원이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디란(Diran 7,257m) |
있는곳 |
파키스탄 히말라야 |
사고자 |
하상원, 이수희 |
디란 피크는 파키스탄 훈자 지방의 소카라코람 라카포시 산군에 있는 "흰 봉우리 산"로
일명 미나핀(Minapin) 피크라고도 불린다.
1892년 영국의 콘웨이팀이 남면으로 탐험을 시작으로
1968년 8월 오스트리아대가 초등 하였다.
울산산악회 원정대(대장 정창수)가 팀을 꾸려 6명의 대원이 출국하여
5월27일 등반을 시작하여 6월1일 1캠프(4,300m)를 설치하였으나
폭설로 등반이 지연되다 6월12일에야 다시 등반을 속개하면서
루트를 북면으로 변경하여 6월18일 C2를 5,100m에 설치하였다.
6월20일 밤 서릉 아래 스노우밴드까지 루트공작을 마치고
2캠프로 돌아와 쉬고 있던 하상원, 이수희 대원의 텐트로 엄청난 눈사태가 덮쳤다.
6월24일까지 구조작업을 펼쳤으나 시신도 찾지 못하고 등반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낭가파르밧(Nanga Parbat 8,125m) 있는곳 파키스탄 히말라야 사고자 김광호
낭가파르밧 킨스호퍼 루트로 등반하던 전주대학교 원정대는
6월23일 C2(6,200m)에 도착하여 C1(5,300m)에서 올라오는 대원들을 위해
텐트 한 동을 설치하고 있었다.
킨스호퍼 루트는 C1에서 C2까지 약 1,000미터의 벽으로
평균경사 60도로 800m가 빙·설벽 이고 나머지 200미터가 수직 벽인데,
C1에서 전성일, 김광호, 채수산 대원이 새벽6시 출발하였다.
오후 5시에 지친 모습으로 전성일 대원이 C2에 도착하자
C2에 있던 대원들이 나머지 2명 대원의 위치를 물으니
암벽지대 중간까지 올라오는 채수산 대원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 후 10분 정도 지나 채수산 대원으로부터 김광호 대원이
수직 200미터 지점에서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는 무전 교신이 날아왔다.
고정로프가 많이 깔려 있는 이곳에서 추락한 원인을 살펴보면,
10시간 정도 주마링 하여 암벽지대로 접근 할 때면 지친 상태이고
암벽지대 중간지점을 지나면 와이어 래더가 있어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주마를 빼서 위쪽으로 옮길 때 자기확보 없이 옮기다
균형을 잃어 추락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수색결과 안전벨트에 주마가 그대로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히말츄리(Himalchuli 7,893m) |
있는곳 |
네팔 히말라야 |
사고자 |
정재홍 |
계명대 개교 3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네팔 마나슬루산군의 히말츄리로 원정을 떠난
계명대산악회는 정재홍(63세·의과대교수) 대장 외 9명의 대원이 7
월16일 선발대 3명과 8월6일 본대 7명이 출국하여
8월29일 4,950m 지점에 BC를 설치하였다.
남서릉 루투로 8월31일 등반을 시작하여 9월4일 C1(5,920m)을 설치하였으나
9월10일부터 베이스 캠프에 있던 정재홍 대장의 건강이 좋지 않아
대원들은 정 대장의 연세를 생각하여 안전하게 하산시킬 목적으로
메일런너를 보내어 헬기요청을 하였으나,
그 날부터 날씨가 나빠 헬기의 도착이 지연되고 있었다.
9월11일부터 전 대원은 등반을 중단하고 BC에 모여 있었다.
9월13일 정 대장이 심상치 않아 산소 마스크를 씌우고 마사지를 하니
좀 회복이 되어 저녁을 드신 후 산소 마스크를 쓴 채
9월14일 오전 1시30분 유명을 달리했다.
다음 날 헬기가 도착하여 시신을 옮긴 후 9월19일 BC를 철수하여
9월26일 학교장으로 영결식을 가졌다.
안나푸르나Ⅱ(Annapurna 7,937m) 있는곳 네팔 히말라야 사고자 김용규, 정갑용
8,000m에 63미터가 모자라는 안나푸르나Ⅱ(7,937m)·Ⅳ(7,525m)봉으로 원정대를 꾸린
영남대학교산악회 는 7월14일 이동명 대장 외 7명의 대원이 출국하였다.
1983년Ⅱ봉 실패 후 6년의 세월을 기다리다 팀을 꾸려 8월26일 BC 건설을 시작으로
9월3 C1(6,200m), 9월7일 C2(7,300m)를 설치하였으나
계속되는 폭설로 9월16일에야 등반을 재개할 수 있었다.
9월20일 Ⅱ봉 공격 조로 김용규(경원고 교사), 정갑용(정동고 교사),
이수진 대원과 셀파 2명 Ⅳ봉 공격 조로 정준모(무역학과 4년), 조원배(조경학과 3년) 대원과
셀파 다와가 편성되어 오전 7시 C2를 출발하여 정상으로 향하였다.
Ⅳ봉 대원들은 정상 등정 후 오후 6시 전진캠프에 도착하였고,
Ⅱ봉 대원들은 7,400m에 C3를 설치하던 중 텐트를 떨어뜨려
5명이 1동의 텐트에서 자고 9월21일 5시30분 셀파와 3명의 대원이
정상으로 출발하였으나,
고정 자일 없이 등반을 할 수 없다는 셀파의 요구에 모두 캠프3로 내려와
김용규, 정갑용 대원이 비박 장비를 준비하여 8시경 정상으로 떠났다.
오후 2시경 정상 바로 밑 안부라는 무전교신 후 실종되어,
수색을 하였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얄륭캉(Yalungkang 8,505m) 있는곳 네팔 히말라야 사고자 진교섭
세계3위 봉 캉첸중가(8,586m)의 서봉으로 불리는 얄륭캉에 도전장을 낸
대구 영남지봉산악회 원정대(대장 김특희)는 10월15일 7명의 대원이
동계 초등의 목표로 김포공항을 출국하였다.
11월8일부터 장장 20일간의 카라반 끝에 11월27일 5,500m 높이의 얄륭 빙하 상단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12월2일 험프지역에 C1(6,150m), 12월5일 아이스폴 지대에 C2(6,600m),
12월8일 그레이트쉘프 지역에 C3(7,500m), 12월12일 씨클 지역에 C4(8,100m)를 설치하고
12월13일부터 2차례의 정상공격을 하였으나
심한 강풍으로 물러난 후 12월20일 진교섭 대원과 셀파 2명이 새벽 4시30분 C3를 출발하여
정상으로 향하였다.
오후 4시5분 정상에 도달한 후 5분 정도 머물다 하산중 등정조가
다급하게 베이스캠프를 찾는 소리가 들린 것은 오후 4시14분이었으며,
그 후 실종되었다.
사흘 간의 수색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흔적은 남동면의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자
그들이 북면 어느 쪽으로 실족한 것으로 판단한 원정대는
베이스캠프를 철수하여 1월12일 귀국하였다.
낭가파르밧(Nanga Parbat 8,125m) 있는곳 파키스탄 히말라야 사고자 정성백
7월2일 C3(6,800m)를 새벽 4시에 송영호, 박신영, 정성백, 문태철 대원이
정상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도중 컨디션이 좋지 않은 문태철 대원은 C3로 하산하고
나머지 3명은 오후에 설영 작업 중 텐트를 날려버려 어렵게 설동을 파고 비박을 하였다.
다음 날 10시25분 컨디션이 양호한 정성백 대원이 혼자서 정상을 향한다는
무전 교신이 있어(불가리아 팀이 함께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음) BC에서
500밀리 망원경 카메라로 정성백 대원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2시30분 무척 힘들다는 교신이 와 하산을 명령하고
계속 카메라로 관찰 중 오후 2시 카메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오후 늦게 정상 등정 후 하산하던 불가리아 대원들이 꿀르와르 하단부 설벽에 박혀 있는
정성백 대원의 피켈 만 발견하였다.
에베레스트(Everest 8,850m) 있는곳 네팔 히말라야 사고자 함상헌
부산에서 활동하는 산악인 11명과 일본 오사카 산악연맹 3명으로 구성된
한일 합동대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8월25일 쿰부빙하 자리 좋은 곳에 BC를 건설하고
10월6일 복진영, 김재수, 박창우, 스기야마 대원과 셀파 2명이
자정에 사우스 콜을 출발하여 정상으로 향했다.
일본 대원은 중도에서 포기하고 3명의 대원은 오전 6시에 정상에 올랐다.
무전기를 갖고 있는 셀파들이 늦게 올라오는 바람에 정상에서
2시간 30분 동안 체류하느라 복진영 대원은 동상으로
후에 발가락 전부를 절단해야 하는 사고를 당한다.
공격조가 정상에 오르는 동안 제3캠프에 있어야 할 이상표, 함상헌 대원은 C4로 올라갔다.
노종백(41 부산클라이머스) 대장은 모두 최대한 낮은 캠프로 철수를 지시했지만,
공격조의 동상과 피로로 C4에서 하루 휴식을 취하는 사이
10월7일 새벽 5시 함상헌 대원이 복진영 대원에게 잠시
사진만 찍고 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그대로 단독등반을 하였다.
오후 4시경 프랑스 국제대가 등반을 끝내고 하산하는데
함상헌 대원이 술 취한 사람처럼 뒤뚱거리며 혼자 등반을 하고 있어
단독등반인줄 알고 남봉에서 산소1통과 오버미튼을 지원해 주었다.
그로부터 1시간 후 또 다른 프랑스 팀이 남봉을 지나 남서벽 쪽으로
물체가 미끄러진 흔적을 발견하였다는 교신을 해 왔다.
이튿날 수색을 하였지만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나푸르나Ⅰ(Annapurna 8,091m) 있는곳 네팔 히말라야 사고자 이상구, 이석주
안나푸르나는 인류가 오른 최초의 8,000m 봉우리로 주봉 외에
동봉, 중앙봉을 거느리고 있으며 남벽, 서벽, 동릉으로 약 10여 개의 루트가
개척되어 있고 동봉-중앙봉-주봉을 연결하는 루트도 개척되어 있다.
대산련 인천연맹의 안나푸르나 원정대는 등반루트를 "공동 묘지",
"자살 루트"로 알려진 노말 루트에서 기술적으로 더 어렸지만
눈사태가 덜한 북면의 더치립(Dutch Rib)
즉 1977년 가을 네덜란드 등반대가 개척한 루트로 변경하여 등반을 하여
8월22일 4,300m에 BC 건설 후 순조로운 등반으로 9월18일 C4(7,300m)를 건설에 이어
다음 날 이상구, 이석주 대원과 셀파들은 정상을 향하여 오르고 있었다.
7,500m 지점서 잠시 휴식 중 눈사태를 만나 8명중 6명은 눈에 휩쓸리거나 묻히고
셀파 2명은 간신히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6,400m 미국대의 제3캠프에서 눈사태 소리를 듣고 데이빗과 낸시가 밖으로 나오니
떨어지는 눈 더미와 함께 이상구, 이석주 대원과 셀파 3명이
안자일렌 상태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셀파 1명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하고 6,400m에서 시신을 옮기기가 불가능하여
그 곳의 양지바르고 안정된 곳에 매장하고 즉각 후퇴를 결정 철수하였다.
푸모리(Pumori 7,161m) 있는곳 네팔 히말라야 사고자 서성수, 김백균, 서영덕
부산 빌라알파인클럽과 부산 패러글라이딩 스쿨이 공동으로 추진한
'92 한국 푸모리 패러글라이딩 원정대는(대장 서성수)
8명의 부산출신 대원으로 구성되어 푸모리를 등정한 뒤
패러글라이딩으로 하산할 계획으로 4월18일 출국하였다.
푸모리는 에베레스트 남서쪽에 있는 봉우리로 1962년 독일대가 초등 하였으며,
1982년 동계에 남선우씨가 남서릉으로 국내 초등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4월30일 5,300m 지점에 BC를 설치한 후 남서릉 루트로 등반을 하여
1캠프에서 한차례 패러글라이딩 활공에 성공한 뒤
5월12일 서성수대장, 서영덕, 김백균 대원과 셀파 1명이 오후 5시 정상 등정 후
구름이 많이 끼여 패러글라이딩을 이용한 하산을 위해
제3캠프(6,800m)로 내려와 하루를 기다린다는 교신이 마지막이었다.
5월14일 원정대는 헬기를 이용해 두 차례 수색작업을 벌인 후
3캠프까지 강종삼 대원이 올라 가 보았으나 대원은 물론 3캠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루프가르사르(Lupghar Sar7,200m) 있는곳 파키스탄 히말라야 사고자 김영재, 정수근
"검은 바위 봉우리"를 의미하는 루프가르사르는 파키스탄 훈자 지방에 있는 산으로
동봉, 중앙봉, 서봉으로 연결된 봉우리로 높이가 모두 7,200m이다.
동봉은 일본이 3회 도전하여 실패로 남아있어 초등을 노린 전주 파이오니스클럽이 도전하여
6월28일 BC(4,250m)를 설치한 후 7월26일 김영재, 정수근 대원이 6,050m를 출발하여
오후 5시30분 6,450m 도착하여 텐트를 설치 한 후 무선 교신을 하기로 하였으나,
밤 12시가 되어도 교신이 되지 않아 C3(6,450m)가 가장 잘 보이는
양치기 마을로 내려가 망원경을 이용해 두 대원을 찾았으나 보이는 것은
스키장 스로프 같은 설사면으로 눈사태의 흔적만 발견하였다.
푸모리(Pumori 7,161m) 있는곳 네팔 히말라야 사고자 김준호
9월15일 카라반 중 탕보체(3,500m)에 도착하여 야영을 하던 중 밤 11시30분 경부터
김준호(19 삼색스포츠 근무)대원이 두통과 고열로 앓았다.
김준호 대원은 다음날인 9월16일 오후 2시경 카라반 도중 사망하였다.
당시 김 대원의 옆에는 한의사와 외국 클라이머들이 있었으나
김준호 대원이 사망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할 만큼 사망 전까지
이렇다 할 특별한 증세를 보이지 않았다.
랑탕리룽(Langtang Lirung 7,234m) 있는곳 네팔 히말라야 사고자 김진현
1차 공격 실패 후 전열을 재정비하여 12월18일 새벽 6시 김진현 대원, 사다 비비,
셀파 도르지가 캠프4(6,800m)를 출발하여 오후 1시에 남서릉으로
동계 초등의 위업을 달성하였으나, 하산 중 사다 비비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김진현 대원과 셀파 도르지가 부축하고 내려오느라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저녁 8시에 제4캠프를 찾지 못했다는 등정조의 마지막 무선을 끝으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다음날 아침 망원경을 통해 제4캠프를 관찰하니 눈사태로 지형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고
등정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고원인은 정상 상태로 하산하면 충분히 2캠프까지 내려올 수 있었으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사다를 데리고 내려오느라 많은 시간이 지체되어
눈사태를 피하지 못한 경우로서 김진현 대원의 살신성인의 정신이 돋보인 등반이었다
사가르마타( 8,850m) |
있는곳 |
네팔 히말라야 |
사고자 |
안진섭, 남원우 |
.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네팔 사람들은 이 산을 보고 "여신들의 어머니(성모)"를 뜻하는사가르마타라 부른다.
에베레스트의 여러 루트 중 어렵기로 소문난 남서벽 루트는
1975년 영국대가 초등정 한 후 우리나라는 5차례 모두 실패하고
의욕적인 등반대를 꾸린 팀이 서울 동국산악회의 '4326 한국 사가르마타 남서벽 원정대'이다.
남서벽 루트는 6,500m에서 정상까지 수직 고도의 2,000m가 넘는 벽으로
8명의 대원이 2월25일 출국하여 3월30일 남서벽 6,100m 지점에 C1을 설치한 후
4월19일 C5(8,300m) 설치하여 박영석 대장과 셀파 까뮈가 2차례 등정 시도를 하였으나
록밴드상에 건설이 많이 내려 등반이 불가능하여 결국 8,500m 도달로 발길로 돌렸다.
5월11일 등반루트를 남동릉으로 바꿔 등반하지만 남서벽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남원우 대원은
혼자서 오르다 7,800미터 지점에서 추락 사망하였다.
한편 남동릉으로 루트를 바꾼 대원들은 고소적응이 된 상태라
5월15일 C4(7,980m)를 사우스 콜에 설치하고 다음 날 박영석 대장, 김진성, 안진섭,
김태곤 대원이 정상으로 오르다 김진성 대원은 체력 저하로 남봉 리지에서 하산하고
나머지 3명은 14시20분 정상에 올랐다.
하산 중 안진섭 대원이 할라리 스텝 부근에서 산소가 떨어져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에서
박영석 대장을 만나 함께 내려 왔으나 C4에 도착하지 못하고 안진섭 대원은 실종되어
다음 날 C2 근처 웨스턴 쿰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
낭가파르밧(Nanga Parbat 8,125m) 있는곳 파키스탄 히말라야 사고자 안춘문
충남대 공대산악회 낭가파르밧원정대(단장 이광순 외 8명)는 5월27일 출국하여
6월6일 BC건설 후 킨스호퍼 루트로 등반을 하였다.
7월7일 C4(7,650m)를 출발한 안춘문(공업교육학과 3년), 박승우 대원은
스페인 팀 2명과 함께 정상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도중에 박승우 대원이 심한 고소증을 느껴 등반을 포기하고 C4로 내려왔다.
스페인팀은 오전 11시40분 등정하였으며, 혼자 등반을 강행한 안춘문 대원은
12시20분 8,070m 지점에서 몸 상태가 나쁘다며 무전교신 후 혼자 하산하다 실종되었다.
시샤팡마(Shishapangma 8,027m) 있는곳 중국 티벳 히말라야 사고자 박병태
서울 거봉산악회 초오유·시샤팡마 원정대는 8월27일 초오유 BC(5,100m)에 도착하여
많은 눈으로 어려운 등반 끝에 9월10일 엄홍길, 최병수, 민경태 대원이 정상에 오른 후
9월18일 시샤팡마 베이스로 이동하여 속전속결 등반으로 9월27일 7,500m에 C3를 설치하였다.
9월29일 엄홍길, 박병태, 민경태 대원은 정상을 향해 출발하여
많은 눈으로 어렵게 전진하고 있었으나 박병태 대원이 자꾸 처지며 컨디션이 좋지 않아
혼자서 하산을 결정하고 엄홍길, 민경태 대원은 정상을 오르면서
하산하고 있는 박 대원의 모습을 보며 저녁 7시30분경 정상을 등정하고
엄홍길 대원이 새벽 3시경 C3 텐트에 도착하니 박병태 대원은 보이지 않았다.
캠프 일대와 등반루트 곳곳을 살펴보았지만
박병태 대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안나푸르나Ⅰ(Annapurna 8,091m) 있는곳 네팔 히말라야 사고자 변준석
1989년 동계 얄륭캉 초 등정, 1991년 에베레스트 동계 원정대를 꾸렸던
대구 영남지봉산악회가 김특희 대장 외 8명의 대원으로 안나푸르나 원정대를 구성하여
11월20일 4,300m에 BC를 설치하고 북면 노멀 루트로 등반을 개시하여
26일 C1(5,500m)을 설치하였으나 12월2일 2캠프로 향하던 송종길(한오름산악회),
하찬수(계명대산악회) 대원이 눈사태를 만나 부상을 입자
등반을 포기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베이스캠프를 철수하여 하산하던 변준석 대원이 절벽으로 실족 사망하였다.
브로드피크(Broad Peak 8,047m) 있는곳 파키스탄 히말라야 사고자 박현재
'95 빛고을 브로드피크 원정대는 위계룡 단장 외 9명으로 구성되어
6월25일부터 등반을 시작하여 4,950m에 BC를 설치하고 7월2일 C3(7,200m)에서
박현재, 이정현 대원은 1차 정상공격을 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실패하고
C4를 7,500m에 설치한 후 7월 12일 박신영 등반대장, 박현재, 이정현 대원과
스페인 대 4명은 새벽4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오후 3시 전위봉에 도착하니 박신영 등반대장은 스페인 합동대의 엄홍길 대원과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오후 4시 박현재, 이정현 대원과 스페인 대 2명은 정상에 올랐다.
하산을 하여 오후 6시30분에 전위봉에 도착한 두 대원은 간식을 나누어 먹고
7시 출발하였다.
설벽 위의 고정로프가 깔려있는 지점에서 박현재 대원(순천대산악부, 1993년 초모랑마 등정)이
실종되었고, 이정현 대원은 7,870m에서 비박 하고 C4로 돌아올 수 있었다.
티리치미르(Tirich Mir 7,708m) 있는곳 파키스탄 히말라야 사고자 김재표, 조준용
31-우리나라는 파키스탄 카라코람 지역으로 등반을 하여 왔으나
처음으로 힌두쿠시 지역 최고봉 티리치미리로 출사표를 던진 원정대는
대산련 경기북부지부였다.
티리치미르는 동부 힌두쿠시 치트랄 지방에 있는 산으로
주봉, 서봉, 동봉, 북봉의 연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봉은 1950년 노르웨이대가 초등 하였다.
이해봉 대장 외 7명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6월29일 김포공항을 출국하여
7월7일 4,800m 지점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였다.
캠프에는 일본, 영국 연방대 원정대도 있었다.
7월9일 C1, 9월12일 C2(5,750m), 9월15일 C3(6,400m), 9월23일 C4(7,200m)를 설치하며
순조로운 등반으로 정상 기회를 노렸으나 7월24일 갑자기 날씨가 나빠지는 바람에
대장은 C4에 있는 김재표, 조준용 대원에게 철수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두 대원은 정상 공격 감행으로 오후 7시에 정상에 올랐다는
교신을 보내온 후 실종되었다.
원정대는 헬기로 구조에 나섰으나 어디에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기라티Ⅱ(BhagirathiⅡ 6,512m) 있는곳 파키스탄 히말라야 사고자 최영환
바기리티봉은 가르왈히말라야 강고트리 지역에 있는 산으로
1938년 독일-오스트리아 합동대가 북동면으로 초등 한 후 1980년 아일랜드팀이
북벽에 신 루트를 개척하여 등정한 봉우리로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산이다.
코오롱등산학교 졸업생이 주축인 서울 하이얀 산악회의 최정식 대장 외 6명이 대원이
북서벽 루트로 등반하기 위해 9월1일 전진캠프를 설치하고 최정식 대장,
이대영, 최영환, 한태희 대원은 이튿날부터 고정자일 설치작업을 진행하던 중
9월3일 1캠프 부근에서 눈사태에 휩쓸렸다.
이 사고로 이, 한 대원은 몸을 연결했던 고정자일이 눈에 섞인 낙석에 맞아 끊어지면서
튕겨 나와 가벼운 부상을 입었지만 최영환 대원은 눈사태에 휩쓸려 실종되었다.
수색을 하였으나 시신은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브로드피크(Broad Peak 8,047m) 있는곳 파키스탄 히말라야 사고자 임순택, 한동근, 양재모
1993년에 이어 브로드피크에 재도전 한 경희대산악부 원정대(대장 홍정표·경희대 치과대학 교수)
7명은 서릉 노말루트로 등반을 시작하여 6월7일 4,900m에 BC를 건설하고 ABC(5,150m),
C1(5,650m), C2(6,150m), C3(7,100m)를 설치한 후 6월20일 한동근, 양재모, 임순택 대원이
0시20분 정상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10시30분 남동릉 콜(7,800m)을 지나
1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오후 3시30분 전위봉(8,036m)에 도착하니
임순택 대원이 가슴에 통증을 호소하여 임 대원은 전위봉에 남고 두 대원은
오후 5시28분 정상에 올랐다.
세 대원이 다시 만난 곳은 전위봉과 콜 사이의 능선이었다(오후 7시30분).
계속 좋던 날씨가 어둠이 깔리면서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하여
오후 8시경 공격조와 BC간의 교신이 이루어져 콜까지 내려오도록 유도하였으나
두 대원이 임순택 대원을 데리고 콜까지 내려갈 수 없다는 교신 후
밤 11시17분 BC와 마지막 교신이 되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르나 추워 죽겠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라는 희미한 목소리가 금속성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날부터 계속 날씨가 나빠 구조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철수하는 6월26일까지 날씨는 나빴다.
칸텡그리(Kantengri 7,010m) 있는곳 천산산맥(카자흐스탄공화국) 사고자 김보현
국제캠프로 유명한 카자흐스탄 칸텡그리 등반에 나선 눈 내리는 산마실 원정대(대장 전삼식)는
김해, 문경, 영천출신 5명으로 구성된 원정대였다.
7월27일 김보현(문경 산들모임산악회) 대원은 9시 6,100m 지점의 제3캠프를 출발하여
지친 상태로 오후 7시30분 정상 등정에 성공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정상 50m 까지 함께 등반한 일본 산악인에 의해 밝혀졌다.
정상에서 30분 머물던 이들은 오후 8시 하산을 시작하였다.
고정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6,960m 지점에 먼저 도착한 일본 산악인은
뒤에 내려오는 김보현 대원에게 어서 내려오라고 손짓하고 하산을 시작해
3캠프까지 내려 왔으나 김보현 대원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체력이 떨어진 김 대원은 고정로프에 도착하기 전 실족.
남일린첵 빙하(포베다 캠프)쪽으로 추락 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2년부터 한국산악인이 찾기 시작한 국제캠프에서 김보현 대원은
첫 한국인 희생자가 되었으며,
그 후 악천후로 수색활동을 제대로 펴지 못하였다.
초모랑마(Chomolangma 8,850m) 있는곳 중국 히말라야 사고자 최병수
경북산악회 창립 40주년을 맞이하여 5대륙 최고봉 등정 목표로 추진된 초모랑마 원정대는
대구·경북지역 대학산악부 주축으로 김특희 대장 외 13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어
북동릉 루트로 등반에 나서 9월4일 5,200m 지점에 BC를 건설하였다.
9월8일 6,500m 지점에 C2를 설치 한 후 9월10일 3캠프 지점인 노스콜로 루트 공작 중
오후 4시경 급경사 설사면에서 갑자기 눈사태가 발생하여 제일 뒤에서 오르던
최병수(계명대 OB산악회)등반대장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휩쓸려 내려가 실종되었다.
등반을 중단하고 수색을 하였지만 시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최병수 등반대장은 '91년 맥킨리(6,194m), 코뮤니즘(7,495m), '93년 초오유(8,201m),
'96년 가셔브롬 Ⅱ(8,035m)를 등정한 유능한 알피니스트였다.
팡(Fang 7,647m) 있는곳 네팔 히말라야 사고자 김여훈
팡은 네팔 히말라야 중부 안나푸르나Ⅰ(8,091m)봉 부근에 있는 봉우리로
강원대학교에서 1991년 도전하여 실패한 후 개교 50주년이 되는
1997년 9명이 재도전하여 11월8일 C5(7,200m)에서 이학영, 김여훈 대원이
정상 공격을 위해 김여훈 대원이 정찰 후 C5로 내려오다 추락하여
바위에 멈춘 후 2차 추락하였다.
텐트에서 등반 준비를 하고있던 이학영 대원이 급히 달려가 더 이상 추락은 막았지만
이미 혼수상태라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탈레이사가르(Thaley Sagar 6,904m) 있는곳 인도 히말라야 사고자 신상만, 최승철, 김형진
대산련 경기연맹북부지부 구조대 탈레이사가르 북벽원정대(대장 김형진)는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 강고트리 지역의 난봉 탈레이사가르 북벽에 출사표를 던졌다.
탈레이사가르는 1976년 6월 영·미 합동대가 북벽∼서릉으로 초등을 한 후
1991년 헝가리 대 피터 데카니(Peter Deakany)와 아틸라 오즈베스(Attlia Oszvath)가
북벽을 초등 했지만 이들은 직등 꿀르와르를 우회해서 올랐다.
그 후 1997년 8∼9월엔 뉴질랜드의 아톨 윔프(A. Wimp)와
호주의 앤드류 린블레이드(A. Linblade)가 이전의 헝가리대가 우회한
꿀르와르(약 500m)를 직등으로 올랐다.
하지만 이들도 6,450∼6,700m 사이의 직등 꿀르와르를 돌아 오름으로써
완전한 직등 루트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북벽 직등 신 루트 개척을 목표로 김형진(대장·익스트림라이더 강사), 손재식(한국산악회),
윤길수(봔트 클럽). 신상만(한국산악회), 최승철(샤모니스포츠 대표),
장기헌(대산련 경기북부지부 구조대) 대원이 8월23일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9월1일 4,670m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고 9월26일 6,450m에서 1차 비박을 한 후
9월27일 신상만, 최승철, 김형진 대장은 헝가리 대, 뉴질랜드 대가 우회했던 구간을
신상만 대원의 선등으로 11시간만에 돌파하고 6,700m지점 "쉘타워"에서
두 번째 비박을 한 뒤 '91년 팀이 "자살구간" 이라며 우회했고,
'97년 팀이 "무시무시하다" 고 한 불안정한 바위와 썩은 얼음이 있는 상단 벽도 역시
신상만 대원의 선등으로 9시간만에 돌파해 북벽 끄트머리 6,800m 지점까지 올랐다.
이제 정상까지는 약100m 정도 설원만 오르면 되었다.
오후 4시쯤 갑자기 정상 부근에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한 시간 후 구름이 걷혔으나 정상벽과 설원 어디에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낀 한시간 사이에 어떤 사고로 인해 추락했던 것이다.
전진캠프에 있던 대원들은 이튿날 1캠프 부근 설원에서 로프에 연결되어 있는
그들의 시신을 발견했다.
두 번의 비박으로 이전의 두 팀이 모두 비껴간 '불가능한' 꿀르와르를 돌파
사실상의 북벽 직등 루트를 열어 세계 등반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세 명은
진정한 등로주의 자였다.
미니아 공가(Minyakonka 7,556m) 있는곳 중국 히말라야 사고자 오종락
공가산은 중국 사천성 대설(大雪)산맥에 위치한 산으로
베이스 캠프에서 정상까지 고도가 높고 등반 길이가 길어 등반대가 외면하고 있는 산으로
1996년 광주·전남학생산악연맹에 의해 국내 최초로 등반되었다.
대산련 전남연맹 공가원정대(대장 김재명)는 북동릉 루트로
11월14일 오후 2시 김재명, 윤중현, 오종락(목포전문대OB산악회)대원이 정상에 올랐으나,
먼저 하산 중이던 오종락 대원이 7,300m 지점 40∼50도의 빙설사면에서
북벽으로 추락하였다.
안나푸르나Ⅰ(Annapurna 8,091m) 있는곳 네팔 히말라야 사고자 지현옥
한국-스페인 합동으로 꾸려진 안나푸르나 원정대는 엄홍길, 지현옥(서원대OB산악회),
박창수 대원이 4월29일 C3(7,500m)를 출발하여 북동 버트레스 루트로
엄홍길, 박창수 대원이 정상을 오른 후 C3로 귀환 할 즈음
엄홍길 보다 뒤늦게 정상에 오른 지현옥과 셀파 까뮈는 하산 중 7,800m 지점서 추락 실종되었다.
정확한 사고 원인을 알 수 없이 실종된 지현옥 대원은 우리나라 대표 여성 산악인으로
'93년 에베레스트(8,850m), '97년 가셔브롬Ⅰ(8,068m), '98년 가셔브롬Ⅱ(8,035m)등
8,000m급 4개를 등정한 산악인이었다.
브로드피크(Broad Peak 8,047m) 있는곳 파키스탄 히말라야 사고자 허승관
연세대 브로드피크 원정대는 6월12일 출국하여 파키스탄·인도 분쟁으로
늦게 베이스 캠프(4,900m)에 도착하여 7월14일 C1(6,150m), 7월15일 C2(6,800m),
7월29일 C3(7,300m)를 설치하였다.
7월29일 3캠프로 향하던 허승관 대원이(연세대 사학과) 두통을 호소하며
자꾸 처지기 시작하여 2캠프로 내려갔다.
2캠프에 도착한 허 대원은 현창길 대원(21세)과 함께 1캠프로 하산 중 서로 헤어져
현창길 대원이 혼자서 비박 후 C1에 도착하니 허승관 대원은 보이지 않았다.
원정대는 즉시 등반을 포기하고 수색작업에 들어가 1캠프 아래 설사면에서
허승관 대원의 우모 파카만 발견하였을 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모 파카가 발견된 지점 아래에는 거대한 크레바스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캉첸중가(Kanchenjunga 8,586m) 있는곳 네팔 히말라야 사고자 한도규, 현명근
99 캉첸중가 원정대(대장 임형칠)는 북벽에 신 루트 개척을 목표로
8월29일 베이스 캠프(5,170m)를 설치하고 9월1일부터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했다.
한국방송공사의 후원으로 우리나라 최초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가운데
9월14일 2캠프에서 3캠프로 오르던 한도규(전남연맹), 현명근 기자(KBS)가
3캠프 아래 아이스폴 지대를 통과하던 중 눈사태에 휩쓸려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함께 오르던 오동진 대원은 대퇴골 골절상을 입었다.
사태 수습 후 9월22일부터 등반을 재개해 7,700m 지점까지 진출 하였으나
연일 계속되는 눈사태로 이인 대원(경북연맹)과 셀파가 부상을 당하여
북벽의 신 루트 개척을 포기하고 북릉의 메스너 루트로 변경하여 등정을 노렸으나
폭설로 인해 등반을 포기하였다.
다울라기리(Dhaulagiri 8,167m) 있는곳 네팔 히말라야 사고자 이수호
경남학생산악연맹의 다울라기리 원정대는 한갑현 원정대장 외 9명의 대원이 팀을 꾸려
북서벽 루트로 등반을 하여 캠프3을 구축하고 알파인 스타일로 정상 등정을 앞둔
9월29일 이수호 등반대장이 5,415m 지점에서 눈사태에 휩쓸려 사망하였다.
푸모리(Pumori 7,161m) 있는곳 네팔 히말라야 사고자 김지연
한국 푸모리원정대(대장 이충직 외 6명)는 동벽-북동릉 루트로 등반을 하였다.
동벽의 수직 고도는 5,600m에서 6,300m까지 700m 정도에 불과하지만
실질적인 등반 길이는 약 1,000m에 달하는 거벽으로 이 원정대는 동벽의 직벽과
오버행 혼합 등반지대를 통과해 북동릉 능선에 올라섰을 즈음,
트레킹 대원이었던 김지연 대원이 베이스캠프 아래 빙하지대에서 실종됨에 따라
6,400m지점에서 정상등정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케이투(K2 8,611m) |
있는곳 |
파키스탄 히말라야 |
사고자 |
박영도 |
2001 동국대학교 K2 원정대는 히말라야 고봉 13개봉을 등정한 박영석 등반대장의
그랜드 슬램을 위해 꾸려진 원정대로 구자준 원정대장 외 13명의 대원이 6월1일 출국하여
6월26일 5,10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여 6월28일 C1(6,000m), 6월30일 C2(6,600m),
7월20일 C3(7,300m), 7월21일 C4(8,060m)를 건설하였다.
7월22일 박영석 등반대장, 상성규, 오희준, 박영도 대원과 셀파 장부, 파상치링 6명이
새벽 1시40분 정상으로 출발하여 10시30분 이번 등반의 최대관건인
병목구간(일명 보틀넥)을 무사히 통과하였으나 박영도 대원은 많이 처져 오르고 있었다.
오후 2시40분 박영석 대장과 세랍 장부, 파상 치링 셀파가 정상에 올랐고,
뒤이어 강성규 오희준 대원도 정상에 올랐다.
하산도중 C4 조금 못 미친 완만한 설벽 구간에서 박영도 대원(서울 산비둘기산우회)이
발을 헛디뎌 오른쪽 첼슨 루트쪽으로 추락하였다.
다음날부터 날씨가 악화되어 수색도 재대로 펴지 못하고 하산 철수하였다.
초오유(Cho Oyu 8,201m) 있는곳 중국 티벳 히말라야 사고자 김수야
대산련 경북연맹 초오유·시샤팡마 비행 원정대는 초오유 북서릉과 시샤팡마 남벽을 통해
8,000m급 2개봉 등정과 초오유 정상에서 패러글라이딩 활강을 목표로
김수야 원정대장 외 9명의 대원이 8월23일 인천공항을 출국하였다.
8월28일 4,800m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원정대는 ABC와 1캠프(6,400m)를 건설하던 중
심한 고소증세를 보인 김수야 대장은 ABC에서 체류하였으나
고소증세가 더욱 악화되어 9월9일 12시 사망하였다.
산악인으로서 패러글라이딩 국내 선수자인 김 대장의 유해는 국내로 운구 되어
10월16일 청도읍에서 영결식을 가졌다.
한편 사태수습 후 등반을 속개하여 9월22일 임병문, 박진옥, 김상봉, 김태만 대원이
초오유 정상에 올랐으며, 시샤팡마는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악수(Ak Su 5,217m) 있는곳 키르키즈스탄 사고자 박기정, 최영선
서울 산바라기산악회 악수원정대(대장 박기정)는 7월8일 출국하여
키르키즈스탄의 악수 북벽에 7월10일 도착하여 BC를 건설하였다.
7월11일 악수로 이동하여 북벽 밑에서 비박을 한 이들은 원래 트로쉬넨코(Troschinenko) 루트로
등반 계획이었으나 전북학생 연맹이 동일한 루트로 등반을 하고 있어
왼쪽에 있는 모쉬니코프(MoshniKov) 루트로 등반을 하였다.
악수 북벽은 표고 차 1,000m에 달하는 거벽으로 인공등반 난이도는 A3∼4까지 나온다.
7월13일 박기정 대장과 최영선 대원은 등반을 시작하여 7월21일까지 9일 동안
벽에서 비박을 강행하며 700m 지점에 도달하여 위로는 별로 등반 가치가 없을 뿐더러
입국 일정이 촉박하여 더 이상의 등반을 포기하고 하강을 하였다.
하강 도중 최영선 대원이 추락하며 낙석을 발생시켜 박기성 대장은
낙석에 맞아 기절한 것 같고 추락한 최영선 대원은 의식은 있었지만
몸 왼쪽 부분이 골절되어 자력 탈출이 어려웠다.
그리고 그 날 밤 천둥번개와 폭우가 2시간 동안 내려 두 대원은 추락, 낙석, 저체온증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목숨을 잃은 것 같다.
마체르모(Machhermo Peak 6,017m) 있는곳 네팔 쿰부히말라야 사고자 김선봉
성균관대학교 쿰부히말 까조리(Kyajori 6,151m)·마체르모(Machhermo 6,017m)
원정대(대장 원종태)는 7월29일 출국하여 8월21일 마체르모 등반 중 낙석사고로
3학년 김선봉 대원이 사망하였다.
로체샬(Lhotse Shar 8,400m) 있는곳 네팔 히말라야 사고자 박주훈, 황선덕
"에베레스트 남쪽에 있는 봉우리"란 뜻의 로체는 주봉인 로체(8,516m), 로체샬(8,400m),
중앙봉(혹은 동봉이라고 불림 8,414m)등 3개의 봉우리로 연결된 산이다.
1970년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남서릉으로 초등 하였으며,
우리나라는 1971년 대한산악연맹, 1989년 대구등산학교가 등반하여
대구등산학교가 초등한 산이다.
전국 산악인으로 구성된 대한산악연맹 로체샬 원정대(등반대장 엄홍길)는
8월9일 선발대, 8월16일 본대가 출국하여 9월3일 로체샬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였다.
9월6일 C1(5,700m), 9월11일 C2(6,100m), 9월12일 C3(6,900m), 10월4일 C4(7,700m) 설치 후
10월5일 새벽4시 정상을 향해 엄홍길 대장, 홍순덕, 박주훈, 황선덕 대원과
셀파가 등반을 하여 12시40분경 전위봉을 통과하여 정상 설벽(8,250m)을 오르던
황선덕(천안공대OB산악회·충남연맹 산악구조대)대원이 판상 눈사태에 휩쓸려
함께 확보를 보고있던 박주훈(서울 청화산악회·서울연맹 산악구조대)대원과 함께
추락하며 실종되었으며, 원정대는 등반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아이거 북벽(Eiger North Face 3,970m) 있는곳 스위스 사고자 신건호, 주동규
알프스 아이거 북벽 등반을 위해 한국대학산악연맹 소속 8명이 원정을 떠나
북벽을 정찰하기 위해 2명이 3개조로 나누어 서릉으로 오르면서 북벽을 정찰하였다.
오후가 되면서 비와 바람을 동반한 악천후의 기상이변이 일어나
정상 밑에서 비박 준비 중 낙뢰가 장비에 떨어지면서
신건호 대장(인하대 산악회)이 300m를 날아가 사망하고
주동규(한양대 산악회)대원은 화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아이거 북벽(Eiger North Face 3,970m) 있는곳 스위스 사고자 배종순, 김원겸
1986년 동계 3대 북벽을 목표로 출국한 부산 엑셀시오 알파인클럽 원정대의 배종순 대장과
김원겸 대원은 12월11일 2박3일 일정으로 아이거 북벽 등반에 나섰다.
신들의 트러바스까지 순조롭게 올라갔으나 이후 10여일 동안 계속된 눈 폭풍으로
기온이 많이 내려가 15일 오후 6시30분 BC로 조난 신호를 보낸 후 실종되었다.
다음해 수색대를 현지로 파견한 결과 배종순 대장의 시신이 정상 아래에서 발견됨으로써
등정 후 하산 도중 사망한 것으로 여겨지며 김원겸 대원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아이거 북벽(Eiger North Face 3,970m) 있는곳 스위스 사고자 허종행
1988년 동국대학교 알프스 3대 북벽 원정대는 7월16일 출국하여
7월28일 허종행, 김진성 대원이 아이거 북벽에 붙여 람페에서 비박 후 다시 등반하여
하얀 거미의 출발 지점에 도착한 다음 비박지를 찾아 약 5m정도 전진하여
그곳에서 비박을 하였다.
7월30일 6시 등반을 재개하기 위해 다시 하얀 거미 출발지점으로 하강하였다.
먼저 김진성 대원을 내려보낸 후 허종행 대원은 박아놓은 4개의 하켄 중
2개의 하켄을 회수 하여 하강하던 중 하켄이 뽑혀 그대로 추락 사망하였다.
5m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진성 대원은 오전 9시30분경 헬기로 구조되었다.
그랑드 조라스 북벽 (Grandes Jorasses North Face 4,280m) |
있는곳 |
프랑스, 이탈리아 |
사고자 |
오창해,추민호,이진욱 |
4명으로 구성된 대구 팔공산악회의 알프스 3대 북벽 원정대는 10월3일 대구를 출발하여
10월15일 새벽 3시 오창해, 추민호, 이진욱 대원이 그랑드죠라스 북벽 익스트림 드림 루트로
등반을 하여 10월18일 밤 정상 아래에 도착하였다고 무전을 알려왔다.
이들이 정상에 섰을 10월19일은 온 종일 통신이 두절되어
날씨가 호전된 10월20일 오후 7시에 정상을 거쳐 하강 중이라는 무전 교신을 받고
혼자 렛쇼산장에 남아있던 김재석 대원은 하강하는 불빛이 원래 계획한 정상에서
깐지오 비박산장을 거쳐 렛쇼산장으로 돌아오는 루트가 아니라 북벽에서 워커능과 더불어
거대한 북벽의 중앙부에 위치하는 수직으로 뻗어있는 끄로스퍼 루트로 하산하고 있기에
가슴을 태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하강 전 오창해 대장과 김재석 대원의 무전 통신에서 대피소를 찾고 있으나 보이지 않는다.
지쳤다고 말했다 한다.
몇 일을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아 김재석 대원은 10월23일 12시50분 비상전화로
샤모니 구조대에 구조를 요청 후 헬기로 수색하여 눈 처마가 무너져 발생한
눈사태 지역에서 이진욱 대원의 시신만 찾아 앙시(Annecy)시 화장터에서 화장하여
팔공산 병풍암 아래 산채에 뿌려졌다.
사고 원인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도 1,000미터에서 자일 하강의 무리수가 따랐던 것 같다.
하강한 꾸르스퍼 루트는 낙석이 심하며,
확보조건이 불량한 코스로 샤모니 구조대에서는 오창해, 추민호 대원도
이진욱 대원의 시신이 발견된 그 부근에서 사망한 것으로 결론짓고
시신들은 북벽 하단의 크레바스 속으로 추락한 것으로 내다봤다.
끄로스퍼 정상부에 걸려있던 눈 처마가 붕괴되면서 눈사태를 일으켜
세 대원을 덮쳤을 가능성으로 추정할 뿐이다.
아이거 북벽(Eiger North Face 3,970m) 있는곳 스위스 사고자 전준수
경기 성남 푸른산악회(회장 고태우)의 알프스 3대 북벽 원정대는 전준수 대장 외 3명으로
팀을 꾸려 6월20일 김포공항을 출국하여 6월27일 전준수 대장과 강경철(29세),
장형원(27세) 대원이 아이거 북벽 헤크마이어 루트를 등반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이틀 간 벽에 매달려 비박 하면서 등반한 이들은 6월29일 오후 8시 정상에 올랐다.
아이거 등반을 마친 이들은 1박2일 동안 뭔히리지 등반에 나서 1시간 등반 후
설동을 파고 비박.
이튿날 날씨가 좋지 않다는 무선연락을 받고 아이거 정상으로 올라가 서릉으로
(서릉은 아이거 북벽을 오른 대부분의 등반대가 하산하는 노멀 루트로 보통 5시간 걸림)
하산을 시작하여 장형원 대원은 걸어서 내려가고 전준수 대장과 강경철 대원은
안자일렌 상태로 내려오고 있었다.
강경철 대원이 설사면에서 바일로 확보를 보는 가운데 전준수 대장은
피톤이 있는 꿀르와르쪽으로 트레버스 하다 추락하였다.
강경철 대원은 추락 당시 전혀 충격을 느낄 수 없었으며, 줄을 당겨보니 매듭만 올라왔다고 한다.
헬기로 수색하여 설원에서 전준수 대장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이 또한 사고 원인을 명확하게 밝힐 수 없으나 강경철 대원은 전준수 대장이 추락한 곳은
30여 미터가 바위지대라 카라비너가 바위와 부딪치며 열렸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는 반면
블랙다이아몬드사(전준수 대장은 블랙다이아몬드사의 걸쇠가 달린 수퍼록 카라비너 사용)는
"아이거 등반 도중 사망한 전준수씨의 비극적 죽음에 관한 보고서"에는
카라비너가 열린 채 발견된 것은 잠금 장치가 흙과 얼음에 고정되어
고장이 났을 것이라며 등반자 자신의 실수에 의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전준수 대장은 일명 오이지란 별명으로 산악인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로
설악산 장군봉 구공길, 북한산 인수봉 오이지길을 개척한 클라이머였다.
마터호른 북벽(Matterhorn North Face 4,478m) |
있는곳 |
스위스, 이탈리아 |
사고자 |
김득기, 최철 |
서울 한얼산악회의 김득기, 최철 대원은 마터호른 북벽 슈미트 루트로 등반하던 중
7월6일 오후에 실종되었다.
이튿날 스위스 산악구조대에 의해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들은 등반 중 선등자가 추락하면서 이 충격을 이기지 못한 하켄이 빠지면서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몽블랑(Mont Blanc 4,807m) 있는곳 프랑스, 이탈리아 사고자 김중광
경남 진해산악회 산악인 2명은 드류 서벽이나 그랑드죠라스 북벽 등반을 계획하고 출국하여
고소 적응 겸 날씨가 좋지 않아 에귀 디 미디 노멀루트로 몽블랑 등반 길에 나섰다가
2000년7월26일 설동에서 1박 후 7월27일 등반 중 천둥번개를 동반한 눈보라가 휘몰아쳐
길을 잃고, 배낭을 벗어둔 채 정상에 올랐다.
등정 후 하산 시 배낭을 찾으려 백방으로 뛰어 다녔으나 못 찾고 설동을 파 악천후를 피했다.
계속 날씨가 나빠 설동에 대피하다 저녁 7시경 극심한 저체온증을 동반한
과로사로 추정되는 가운데 김중광씨는 사망하였다.
남은 대원은 9월29일 설동을 탈출하여 영국산악인에 의해 구조되었다.
2001년 진해산악회 회원 13명이『알프스에 묻힌 친구를 찾아서』란 원정대를 구성하여
7월26일부터 8월11일까지 몽블랑을 찾았지만, 시신을 찾는데는 실패하였다.
아이거 (Eiger 3,970m) 있는곳 스위스 사고자 신문희
경기도 성남 석우산악회의 알프스 원정대(대장 신문희)는 3명의 대원이
아이거 북벽 헤크마이어 루트로 8월8일 신문희 대장과 김영은 대원이 오후 8시경
제비둥지 까지 진출 하였으나 악화된 날씨로 탈출하여 새벽 2시경 BC로 귀환하였다.
8월13일 새벽 5시 서릉으로 경북전문대 4명과 신문희 대장, 박순관 대원이 등반을 하여
두 번째 크럭스(3,400m)를 통과하여 3,700m 크럭스에서 두 팀은
정상 등정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하산 도중 눈사태가 발생하여
경북전문대 최호성 대장과 신문희 대장은 약 1,500m 휩쓸려
신문희 대장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최호성(34세) 대장은 구조되어 헬기로 후송되었다.
맥킨리(Mckinley 6,194m) 있는곳 북미 알래스카(미국) 사고자 고상돈, 이일교
맥킨리는 북미 대륙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한국 초등을 노리고 1979년 출국한 원정대는
한국일보사(고상돈), 고령산악회, 고려대학교산악회이다.
한국일보사, 고려대산악회는 웨스트 립, 고령산악회는 웨스트 버트레스 루트로 계획하여
가장 먼저 출국한 한국일보사 원정대가 1979년5월15일 랜딩포인트에 도착하였다.
웨스트 립 코스로 등반하여 5월29일 고상돈, 이일교, 박훈규 대원이 정상에 올랐다.
고도차 4,060m를 14일만에 올랐으니 굉장히 빠른 속도로 등반을 하였다.
새벽 2시15분에 정상에 오른 후 하산하다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부근서 800m 정도 추락하여
고상돈 대장과 이일교 대원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박훈규 대원은 구조되었다.
고상돈 대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레스트(1977년)를 등정한 산악인이었다.
아콩카구아(Aconcagua 6,959m) 있는곳 남미 안데스산맥(아르헨티나) 사고자 김용환
우리나라 최초로 아콩카구아봉을 등반한 산악회는 서울대학교 문리대OB산악회이다.
김용환(대장), 공응대, 최중기, 이도원, 이선용 대원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1980년12월18일 출국하였다.
북면루트로 등반을 시작하여 12월31일 4,040m의 레퓨지오 에헤르클토(Refugio Ejerclto)에
BC를 설치 후 고소적응으로 시간을 보내다 1981년1월18일 캠프2(6,000m)에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이선용 대원을 제외한 4명은 07시40분 정상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6,300m 지점에서 김 대장이 힘들어하여 인디펜덴사 대피소(6,400m)까지 올라가
점심을 먹으니 김 대장이 회복되어 2개조로 편성하여 등반하던 중 6,600m 지점서
김용환 대장이 실종되었다.
한 조를 이룬 공응대, 최중기 대원이 오후 8시40분 정상에 올랐다.
김 대장은 추락하여 6,000m 지점서 그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요세미터(Yosemite) Half Dome 있는곳 미국 캘리포니아 사고자 이영순
지충현 대원이 하프돔 1피치를 완료하고 2피치를 오르는 순간 선등자가 있는 곳에서
성인 1/2크기의 낙석이 발생하여 세컨드인 이영순 대장 머리 위 2m 지점에서 벽면에 부딪혀
자일을 절단 시키고 여러개로 쪼개 지면서 그 중 하나가 이영순 대장의 왼쪽 목을 중심으로
머리부분과 어깨를 강타하여 사망하였다.
맥킨리(Mckinley 6,194m) 있는곳 북미 알래스카(미국) 사고자 진성종,양영수,홍성탁
'92 제주대학교 맥킨리 원정대는 웨스트버트레스 루트로 장덕상 등반대장,
서동춘, 강성규 대원, 웨스트립 루트로 양영수 부대장, 진성종, 홍성탁 대원등
2개조로 나누어 등반을 하였다.
1992년5월10일부터 맥킨리 데날리는 열흘동안 시속 100마일의 눈보라와 폭풍으로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악천후로 많은 원정대가 조난으로 사망하거나 구조되었다.
웨스트버트레스 조는 5월18일 웨스트립 조를 지원할 겸 5,200m 지점에
캠프를 설치하기 위해 맥킨리 시티를 출발하여, 4,600m 헤드월 지점에
식량 데포지에 이르렀을 때, 4,800m 이상은 강풍으로 운행이 힘들다는
일본 등반대의 조언에 따라 캠프사이트를 마련하던 중,
스노우 브릿지가 붕괴되어 크레바스로 빠져 장덕상 등반대장이 겨우 빠져 나와
구조를 요청한 뒤 강성규, 서동춘 대원이 구조되어 동상과 부상이 심한 서동춘 대원은
헬기로 후송되었다.
한편 웨스트립 조는 5,200m 지점에 공격캠프를 설치하고 내일(5월19일)
정상-데날리 패스를 거쳐 맥킨리 시티까지 철수하겠다는 무전 연락이 왔다.
5월20일 오전 10시경 웨스트립조의 양영수 부대장은 오늘 중에 맥킨리 시티로
탈출하겠다는 교신이 마지막이었고, 양영수(제주대 졸업생), 진성종(어업학과 4년),
홍성탁(회계학과 3년) 대원은 데날리에서 가장 위험한 곳 중의 하나인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에서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맥킨리(Mckinley 6,194m) 있는곳 북미 알래스카(미국) 사고자 김기원, 이상명
북미 최고봉인 맥킨리는 알래스카 중남부의 Denali National Park에 위치한
해발 6,194m의 산으로 1897년 W.A디키가 이빙하에 접근하는데 성공하여
당시 미국 제25대 대통령에 당선된 월리엄 맥킨리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인데,
1980년 기존의 국립공원과 데날리 국립보호구역을 통합하여
Denali National Park and Preserve로 개칭하면서 Mcknley를 Denali로 개칭하였다.
김기원 대원은 '94년 맥킨리 국립공원 레인져 자원 봉사자로 활동 중
웨스트 버트레스 맥킨리시티(BC)벽 등반 후 기상 악화로 5월21일 조난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상명 대원은 웨스트 버트레스 Head Wall 하단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김기원 대원은 '91년, '92년, '93년 연속 맥킨리 봉을 등정한 부산 상봉산악회 회원이었다.
아콩카구아(Aconcagua 6,959m) 있는곳 남미 안데스산맥(아르헨티나) 사고자 강준호
1997년12월27일 북면 노말루트의 BC 데 뮬라스(4,250m)를 출발한 요산동우회의 강준호가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6,959m)를 1988년1월2일 오후 3시30분쯤 등정 후,
하산 하다 실종되었다.
6,300m 지점의 윈디트레버스 아래 사면에서 의문의 추락으로 1주일만에 시신이 발견되었다.
아르헨티나 경찰당국은 시신 부검 결과 폐부종으로 결론을 내렸다.
사고를 당한 강준호는 아콩카구아, 엘부르즈, 맥킨리, 킬리만자로 등
4대륙 최고봉을 오른 산악인이었다.
아콩카구아(Aconcagua 6,959m) 있는곳 남미 안데스산맥(아르헨티나) 사고자 박상석
관세청불규칙산악회 원정대는 박상석(서울세관), 박규창(37 울산세관), 고문기 대원으로
구성되어 1998년12월28일 오로코네스(Horcones) 관리사무소에 입산 신고를 마치고
첫 날 캠프지인 콘프루엔시아(3,300m)에 도착하여 4,300m에 있는
플라자 데 뮬라스 까지 오르는 강행으로 심한 고소에 시달리며 등반을 계속하여
텐트, 침낭도 없이 리베르따드 대피소에서 비박 후 새벽 4시20분 출발하여 정상으로 향했다.
8시 박규창 대원이 인디펜덴시아(6,500m)에 도착하여 1시간을 기다렸으나
두 대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등정을 포기한 것으로 생각하고
혼자 등반하여 오후 3시 등정하고 하산 중 오후 6시30분 카날레타(6,700m) 하단부에서
올라오고 있는 박상석, 고문기 대원을 만났다.
박상석 대원은 거의 탈진 상태의 모습이었다.
레인저와 타 등반대의 하산 종용을 무시하고 오르던 두 대원은 정상 부근에서 헤어져
새벽1시20분 고문기 대원이 정상에 올랐으나 박상석 대원은 정상 부근에서 동사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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