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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장비,정보/세계의 대표산악인

휼륭한 주부이자 뛰어난 등반가 줄리 튤리스

by [대전]풀때기 2011.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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휼륭한 주부이자 뛰어난 등반가 줄리 튤리스

 

휼륭한 주부이자 뛰어난 등반가는 불가능?

 

불구된 남편 돌보며 생계 책임…

30대 후반부터 세계 명산 섭렵,

최고의 산악다큐 제작자로 활약

 

 

 

 

 

 

 

 

 

 

산악인들은 대체로 이기적이다.

산에 미쳐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등한시하고 언제나 삶과 죽음을 가르는

벼랑 끝 위를 걸어가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특히 가족들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들다.

남성들의 경우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가사노동의 하중을 더 크게 짊어질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경우는 오죽하겠는가?

그들은 때때로 산과 가정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잔혹한 기로에 서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전자를 택한 결과 가정을 등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주변에도 이처럼 본원적인 갈등에 부딪혀 괴로워하는 여성 산악인들이 많다.

그들이 괴로움을 토로해올 때 내가 언제나 상기시켜주는 사람이 바로

줄리 튤리스(1939~1986)다.

 

 

 

 

도대체 한 사람의 여성이 훌륭한 아내이자 자애로운 어머니이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는 동시에,

등반을 중심으로 한 산악활동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선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성적으로 판단해보자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줄리는 그 일을 해냈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부은 전력투구에 덧붙여

가슴 속에서 한 없이 용솟음쳐 오르는 사랑이 없었더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모성’과 ‘여성성’을 마음껏 펼치면서도

최고의 산악활동을 보여준 위대한 여성 산악인으로 추앙 받는다.

 

 

 

 

영국에서 태어난 줄리가 아마추어 클라이머였던 언니를 따라다니며

암벽등반의 세계로 빠져든 것은 17세의 소녀 시절이었다고 한다.

여린 감수성과 빼어난 미모를 갖춘 소녀 클라이머는 곧 사랑에 빠져든다.

영국의 주요 암장에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주 마주치게 되던

청년 클라이머 테리가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줄리는 첫사랑 테리와 20세 때 백년가약을 맺고 성실한 생활인이 된다.

두 명의 아이를 낳고, 식료품점과 등산장비점을 경영하며,

청소년들을 위한 암벽등반 교실을 열어 강사로 활동하는 소박한 삶이었다.

“비록 가난하고 힘겨웠지만 행복한 시절이었어요.”

20대의 줄리는 사랑에 빠진 신부이자 행복한 어머니였다.

적어도 남편인 테리가 교통사고를 당해

왼쪽 다리에 심각한 장애가 생기기 전까지는.

 

 

 

 

“처음엔 물론 절망했지요.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뿐,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어요.

어찌되었건 삶을 꾸려나가야 했고,

그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남편이었으니까요.”

 

불구가 된 남편을 위한 줄리의 헌신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그녀는 남편의 재활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여

유도나 가라테 같은 동양 전통무예를 익혀 스스로 남편을 가르쳤고,

신체의 구조와 기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훈련이었다고 자평했다.

그녀는 거의 구멍가게 수준이었던 식료품점과 등산장비점을 열심히 경영해

두 아이를 모두 번듯하게 키워냈다.

더 나아가 남편과 함께 살고 있던 자그마한 지역 사회를 위해

자신이 펼 수 있는 최선의 자선활동을 했다.

 

“당시 남편과 함께 가장 열심히 했던 활동은 불량 청소년을 선도하고

장애 청소년들에게 암벽등반을 가르치는 것이었어요.

그런 활동은 그들을 순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저희 자신에게도 커다란 용기를 줬지요.”

 

 

 

 줄리 튤리스가 1986년 정상을 정복한 뒤 내려오다 유명을 달리한 히말라야 K2의 웅장한 모습.

 

그는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최고의 산악활동을 한 위대한 여성 산악인이다.

 

 

 

 

줄리의 30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참다운 용기와 헌신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때까지 그녀는 무명의 등산애호가에 불과했다.

그녀가 가정이라는 좁은 둥지를 벗어나 세계 산악계로 날아오른 것은

놀랍게도 30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아이들이 성장했으니까요.

고맙게도 모두들 번듯한 어른으로 자라나 주었어요.

그들이 제 앞가림을 할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저는 비로소

보다 넓은 세상으로 눈길을 돌릴 수 있었죠.”

 

 

 

 

1977년이 되자 그녀는 여전히 불구이기는 하나

웬만한 동작들은 해낼 수 있게 된 남편과 함께 안데스 등반에 나선다.

페루의 피스코와 와스카란이 그녀의 발 밑에 떨어진다.

 

1980년은 그녀의 삶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남편과 아이들을 모두 영국에 남겨둔 채 그녀 홀로 6주간의 미국여행에 나선 것이다.

목적지는 물론 캘리포니아의 요세미티.

그녀는 이때 4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거벽 루트 46개를 완등하며 기염을 토한다.

모두 다 이전 20여년 간 하루도 빠짐없이 연마했던 암벽등반 솜씨 덕분이었다.

 

 

 

 

줄리가 세계 산악계에 본격적으로 데뷔한 것은

1982년의 프랑스 낭가파르바트 원정대를 통해서였다.

당시 그녀가 맡은 직책은 등반대원이 아니라 촬영대원이었다.

본의 아니게 가장 노릇을 떠맡아야 했던 가정주부 시절,

남편의 취미활동을 돕기 위해 배워두었던 사진과 촬영 솜씨가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원정을 통해 이후 자신의 가장 믿음직한 등반파트너가 되어줄

오스트리아의 산악인 쿠르트 디엠베르거를 만나게 된다.

줄리와 쿠르트는 이때 촬영한 산악 다큐멘터리 영화 ‘디아미르’로

스페인 국제산악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고

그 여세를 몰아 프랑스와 이태리에서도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름 없던 가정주부가 세계 최고의 산악영화 제작자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이후 그녀는 히말라야 고산등반과 산악영화 제작 분야에서 참으로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1983년 이탈리아 K2 북릉 원정대,

1984년 스위스 K2 원정대,

1985년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와 오스트리아 낭가파르바트 원정대,

1986년의 국제 K2 원정대의 등반 모습이 모두 그녀의 카메라에 담겼다.

1984년에는 브로드피크 정상에 올랐고,

1986년에는 K2 정상에도 올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1986년 K2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히말라야에 들어선지 고작 5년 만에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줄리가 자신의 모든 꿈을 다 펼치기에는 너무나 짧았던 기간이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에 후회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너무도 수많은 꿈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지 않다면 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심산/산악문학작가

 

 

 

 

● 줄리와 히말라야 - 위대한 예술이라던 K2와 영원히

 

 

 

"히말라야에서는 나 자신이 예술작품의 일부가 된다"

 

히말라야를 탐미적 영상에 담은 최고의 여성 산악인 겸 영화인

 

 

 

 

1983년 이탈리아 K2 북릉 원정대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한 방송국에서 의뢰한 산악 다큐멘터리 영화의 제작을 위해

이 원정대에 참여했다.

이탈리아 원정대가 고소캠프를 건설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쿠르트와 함께

K2 일원을 샅샅이 탐험했다.

영국의 산악인 겸 탐험가 영 허즈번드, 에릭 십튼, 빌 틸먼의 발자취를 따라

거대한 빙탑 사이를 헤매고 6,000m 급 무명산에 처음 오르기도 하는 멋진 탐험이었다.

 

 

 

이탈리아 원정대가 북릉을 통해 정상에 오르자 그녀와 쿠르트는

노멀 루트를 통해 정상으로 향했다.

줄리는 당시 7,900m 부근에서 야영을 하던 중

수천 개의 봉우리가 붉은 석양 속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광경을 목도했을 때의 감격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위대한 예술작품이었어요.

나 자신 역시 그 예술작품 속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아 정말 황홀했지요."

 

탐미적 예술가 줄리의 모습을 잘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만약 이때 K2 정상에까지 올라섰더라면 줄리의 삶은 다르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와 쿠르트는 8,000m 부근에서 20시간 동안 폭풍설에 갇히는 바람에

정상 등정을 포기했다.

이후 K2는 줄리에게 '꼭 오르고 싶은 산'이 되어버린 것 같다.

1984년에 다시 한번 실패한 이후 1986년에는 기어코 정상에 올랐지만,

그곳은 '돌아올 수 없는 산'이 되어버렸다.

줄리는 자신의 표현 그대로 '거대한 예술작품의 일부'로 영원히 그곳에 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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