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보문산-
유회당 , 여경암 ,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 , 보문사지
유회당 위치: 대전 중구 무수동 94
여경암 위치: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140-1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 위치: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299-1
보문산 유회당 , 여경암 ,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 , 보문사지
보문산은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 외 11개 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높이는 457.6m이고, 주봉은 시루봉이다. 시 중심부 남쪽에 솟은 산으로, 대전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산중에 하나이지만 이 보문산에 대다수의 대전시민들이 모르는 문화재가 있으니 바로 무수동에 있는 유회당 , 여경암 ,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 , 보문사지 이다. 이외에도 여러 문화재가 있지만 무수동에 있는 문화재를 중심으로 소개해 보고자 자료를 올려본다.
대전 중구 무수동에 위치한 무수천하마을은
유회당 , 여경암 ,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 , 보문사지 등등 역사적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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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회당(부)기궁재 [ 有懷堂奇窮霽 ]
건립시기:조선 영조 연간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 조선시대 영조 때 유회당 권이진(權以鎭)이 찬성공(贊成公) 권유(權惟)의 산소를 정한 후 지은 건물이다.
묘소 낮은 야산 기슭에 사괴석(四塊石 : 한 사람이 네 덩이를 질 만한 돌)담장으로 일곽(一廓)을 만들고 서남향으로 배치하였다. 대문 안에 연지(蓮池)가 있고 후면에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고 유회당을 건립하였는데, 뒤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원주(圓柱)를 세운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이것은 원래 사당이었으나 지금은 판각(板閣)으로 사용하고 있다. 오른편에는 삼근정사(三近精舍)라는 부속건물이 있는데 T자형 평면에 팔작지붕이다. 이 건물은 시묘(侍墓)를 위한 집으로 그 예가 희귀하다.
유회당 왼편 협문(夾門) 안에는 안채와 새로 건축된 솟을삼문형 건물이 있다. 여기에는 옥실(屋室)과 그 좌우면에 평난간(平欄干)을 돌린 반칸(半間)의 툇마루가 있다. 옥실 내부는 중앙에 그 통간(通間)으로 우물마루 대청을 두었고 그 좌우에 1칸짜리 온돌방을 2개씩 배치하였다.
좌측은 구족재(求足齋), 우측은 불기재(不欺齋)이다. 대청 전후면에 같은 평주(平柱)를 세워 대량(大樑)을 걸고, 그 양편에 동자주(童子柱 :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를 배치하여 종량(宗樑)을 받쳤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유회당판각 (有懷堂板刻)
분류:기록유산 / 서각류/ 목판각류/ 판목류
수령/면적: 246판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20호
이 책판은 유회당 권이진(1668∼1734) 선생의 문집을 새기기 위해 만든 판목이다.
권이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송시열의 외손자이다. 권이진은 1694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당쟁으로 인해 순탄하지 못했다. 1728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궁중에서 민간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 것과 공물을 정해진 액수 이상으로 거두지 말 것 등을 건의할 만큼 성격이 곧고 강직하였다.
이 문집에는 시와 소(疏:상소글) 등이 실려있으며, 유회당 선생이 관직에 있던 1700∼1734년 사이의 많은 사료가 실려 있다.
권이진 선생의 증손자인 권상서가 순조 초에 판각한 것이며, 재질은 배나무와 소나무이다. 총 246판에 많은 사료가 실려있으며, 여러 외교자료와 『연행일기』그리고 성리학에 관련된 자료들은 당시의 학문과 국제정세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문화재청
여경암(부)거업재산신당 [ 餘慶庵(附)居業齋山神堂 ]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에 있는 암자와 부속건물.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조선 영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이 선인의 묘소를 지키기 위하여 1715년(숙종 41)에 건립하였으나, 뒤에는 그의 후손들과 후학(後學)의 교육 장소로 활용되어왔다.
여경암의 뒤편에는 산신각이, 그리고 그 앞으로는 서당 건물로 사용되었던 거업재가 일곽을 이루면서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여경암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평면을 구획한 후, 다시 양단간 뒤편으로 2칸씩을 각각 붙여 {{#079}}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이다.
구조는 자연석으로 높게 쌓은 기단 위에 큰 활석의 덤벙주초석을 놓고 굵은 원형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상부에는 주두(柱頭)를 놓고 보[樑] 방향으로는 간결한 양봉(樑棒)이, 그리고 도리 방향으로는 양쪽에 소로[小累]가 끼워진 주심첨차를 결구시켜 간단한 형태의 공포(栱包)를 설치하였다.
건물의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만들고, 전면 툇마루 천장은 소란반자로 꾸몄다. 툇마루 주변에는 간단한 난간을 설치하였고,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거업재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장방형 평면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만든 작은 건물로, 각각 2칸의 마루와 2칸의 온돌방, 1칸 부엌과 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신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작은 평면이다.
내부에 작은 불단을 만들고 신선도를 걸어 두었다. 구조는 자연석 기단 위에 방형의 기둥을 세웠는데, 공포는 전형적인 무출목(無出目) 초익공이며, 창방으로 결구된 기둥 사이에 4개의 소로가 끼워져 있다.
가구는 대들보 위에 낮은 사다리모양의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고 있는 3량집으로 간결하게 구성하였으며, 종도리 장명(長名) 아래에 ‘崇禎紀元後五光緖八年(숭정기원후5광서8년)’이라는 상량문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산신당 [ 山神堂 ]
이칭별칭:산제당,동제당,서낭당,당산,본향당
마을의 수호신으로 산신을 모셔놓은 신당.
한국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서 예로부터 강했던 산악숭배에서 유래해온 것으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
첫째는 큰 산이 있는 곳에서 산악숭배를 구상화(具象化)한 것으로 대관령의 산신당이나 서울의 보현산신각(普賢山神閣: 서울특별시 종로구 平倉洞, 서울특별시민속자료 제3호) 등이 그러한 예가 될 수 있다.
둘째는 동제당으로서의 산신당이다. 동제당은 지방에 따라서 산신당ㆍ서낭당ㆍ당산ㆍ본향당 등으로 다양한 명칭들을 가진다. 그 중에서 산신당이라는 명칭은 통계적으로 경기도ㆍ충청도ㆍ강원도 순서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물론, 이 지방들에도 산신당이라는 명칭 외 산제당ㆍ동제당ㆍ서낭당이라는 명칭들이 사용된다. 같은 동제당이라도 영남ㆍ호남 지방에서는 당산이라는 명칭이 많다.
제주도의 경우 마을의 수호신당을 다 본향당이라 부르고 산신당이라는 이름은 거의 들을 수가 없다. 셋째는 산신당 형태들의 민간신앙이 불교와 융화해서 이루어진 사찰 내의 산신당이다.
이것은 불교 포교의 한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에 민간의 신앙이 두터운 칠성도 같이 모셔서, 그 명칭이 산신당ㆍ산신각이 될 수도 있고, 칠성각이 될 수도 있어 꼭 일정하지는 않다.
이상 산신당들의 형태 중 사찰 내의 경우는 한칸 내외의 조그마한 목조 기와집이 거의 전부이다. 큰 산의 산신각도 대개 같다. 그러나 마을 수호신당인 산신당은 일반 동제당과 같이 신목만의 경우가 많고, 신목에 당집이 곁들여진 경우도 있고, 드물게는 당집만인 경우도 있다.
당집이 생기면 안에 위패나 산신도가 모셔지는 경우가 많은데, 산신도는 대개 범을 곁들인 노인상이 된다. 한국의 산신은 옛날부터 범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산악숭배와 범의 인격화가 산신령이라고 할 수가 있다. 동제당으로서의 산신당의 제의는 일반 동제당과 그 성격이나 내용이 같다.
참고문헌
『한국무속연구(韓國巫俗硏究)』(김태곤, 집문당, 1981)
「한국신당형태고(韓國神堂形態考)」(장주근, 『민족문화연구』1,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64)
『部落祭』(朝鮮總督府, 1937)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0, 한국학중앙연구원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 일원 [安東權氏有懷堂宗家一圓]
대전유형문화재 제29호
출처
문화재청
보문사지 [ 普文寺址 ]
건립시기: 고려 말기
규모(면적):4,101㎡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4호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4호. 지정면적 4,101㎡.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로 추측되는 유적은 보문산(普門山)의 정상에서 배나무골로 넘어가는 남쪽 경사면 7부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남향한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정지하여 3단의 축대를 쌓았는데, 범위는 동서 약 70m, 남북 약 50m이다.
사역(寺域)은 아랫단에 1개소, 중간에 2개소의 건물터가 남아 있으며, 주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가장 윗단으로 나뉜다. 아랫단에는 북으로 길이 10여m, 높이 1m에 이르는 축대가 쌓여 있으며, 전면 6칸, 측면 2칸 건물로 추정되는 초석이 남아 있다.
초석은 모두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중간단은 파괴가 심하여 규모를 추정할 수 없다. 제일 윗단 앞에는 축대 바로 밑에 괘불(掛佛)의 지주(支柱) 한 쌍이 서 있어서 이곳이 금당(金堂)자리인 것을 알 수 있다.
높이 95㎝, 한 변 길이 16×35㎝인 두 개의 지주는 20㎝의 간격을 두고 서 있다. 사역 안에서 기와조각과 도자기조각이 많이 나오는데, 주로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것들이어서 사찰의 경영이 주로 조선시대에 오랫동안 이어졌던 듯하다.
조선 말의 기록인 『도산서원지(道山書院誌)』에는 ‘丙辰丁巳年以 炭翁先生配停干川內 柳等浦山內 三面役夫…同月十五日 禹進士家財瓦薨 四面民丁及普門同學 高山寺 栗寺僧軍 拜八百餘名運入……(병진정사년이 탄옹선생배정간천내 유등포산내 삼면역부…동월15일 우진사가재와훙 사면민정급보문동학 고산사 율사승군 배800여 명운입……)’이라 기록되어 있어 보문사가 이 지역의 중요한 사찰의 하나였던 사실을 적고 있다.
보문사지의 동쪽 계곡에 석조(石槽)가 있으며, 주위에는 맷돌 1기, 물레방아 확2개, 세탁대 1개가 남아 있어 승군(僧軍)을 파견할 수 있었던 사 세(寺勢)를 짐작할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보문사지의 당간지주 [ 幢竿支柱 ]
당(幢 : 불화를 그린 旗)을 걸었던 장대, 즉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우는 기둥.
돌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나 철제·금동제·목제인 경우도 있다.
기본형식은 두 기둥을 60∼100㎝의 간격으로 양쪽에 세우고 그 안쪽 면에 상대하여 간(杆)을 설치하기 위한 간구(杆溝)나 간공(杆孔)을 마련하고, 아래에는 간대(竿臺)나 기단부를 시설하였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당간지주는 기단부의 구조가 거의 파손되고 교란되어 있는 상태이다.
당간지주를 간구 또는 간공의 위치 및 형태·외형·장식 등에 의하여 분류하여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간구·간공의 위치나 형태에 따라 구분하면 원형 또는 방형의 간공이 세 군데 관통되어 있는 것, 윗부분에만 간구가 있는 것, 윗부분에는 간구가 있고 그 아래로 2개의 관통된 간공이 있는 것, 윗부분에 간구가 있고 그 아래로 방형의 작은 간공이 1개 또는 2개 있는 것 등이 있다.
둘째, 외형에 따라 분류하면 一자형, 기둥의 바깥면 중간에 한 단의 굴곡을 주어 상·하부로 나눈 것, 기둥 바깥면의 두 곳에 굴곡을 주어 허리가 잘룩하게 보이도록 한 것, 그 밖의 특수한 형태 등으로 나누어진다.
셋째, 기둥에 새겨진 장식에 따라 구분하면 바깥면 모서리에 모죽임만 있는 것, 선문(線文) 또는 돌대(突帶:돋을띠무늬)로 장식한 것, 선문이나 돌대로 장식하고 그중 꼭대기의 사분원(四分圓)에 한 단의 굴곡을 둔 것, 그 밖의 특수한 모양을 가진 것 등이다. 이러한 당간지주의 형태는 시대가 흐름에도 큰 변화가 없고, 다만 각 면에 장식된 무늬와 기둥의 돌다듬기 수법만이 시대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정도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당간지주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것이며, 그 이전에 조성된 예는 남아 있지 않다. 통일신라시대의 예로는 부석사당간지주(浮石寺幢竿支柱, 보물 제255호)와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 제59호)를 비롯하여, 기단부까지 완전하게 남아 있는 금산사당간지주(金山寺幢竿支柱, 보물 제28호) 등으로, 각 부에서 세련되고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827년(선덕왕 10)이라는 제작연대를 밝힌 명문이 새겨져 있는 중초사지당간지주(中初寺址幢竿支柱, 보물 제4호)는 다른 당간지주의 편년을 고찰할 수 있는 기준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와 같이 안쪽 면을 제외한 각 면에 종선문(縱線文)을 조식(彫飾)하고 주두(柱頭)도 원호(圓弧)를 이루었으며, 간대와 기단 등 각 부분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무늬가 형식화 또는 약화되어 정교하지 못하고 돌다듬기도 고르지 않아 둔중한 느낌을 준다. 대표적인 예로는 만복사지당간지주(萬福寺址幢竿支柱, 보물 제32호)·천흥사지당간지주(天興寺址幢竿支柱, 보물 제99호)·춘천근화동당간지주(春川槿花洞幢竿支柱, 보물 제76호)·홍천희망리당간지주(洪川希望里幢竿支柱, 보물 제80호)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처럼 거대한 규모의 당간이나 지주가 조성되지는 않았다. 법주사의 당간과 같은 경우도 원래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지주에 당간만을 근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는 대개 작고 낮으며 선문 등의 조식이 없는 지주에 목조의 당간을 세웠는데, 그나마 지금은 당시 중창한 여러 사찰에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부터 당을 세우기 위하여 사찰 앞에 설치되었던 건조물이면서, 한편으로는 사찰이라는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당간지주는 선사시대의 ‘솟대’와도 일맥상통하며, 일본의 신궁(神宮)이나 신사(神社) 앞에 있는 ‘도리이(鳥居)’와도 특히 관련성이 많은 건조물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統一新羅時代幢竿支柱와 石橋(李浩官, 考古美術 158·159, 1983)
慶州地方 幢竿支柱의 硏究(朴洪國, 慶州史學 4, 東國大學校慶州캠퍼스國史學會, 1985)
慶州を中心とせる新羅時代幢竿支柱論(藤島亥治郎, 史蹟名勝天然記念物 8·11, 1933)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보문사지석조 (普文寺址石槽)
대전광역시 문화재 제10호
보문사터에 남아 있는 것으로, 사찰내에서 스님들이 사용하는 물을 담아두던 곳이다. 보문사는 확실한 창건시기를 알 수 없지만, 대전시 탄방동에 자리하고 있는 도산서원의『연혁지』에 이 절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서원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법맥을 잇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터에는 건물자리 5개와 석조·괘불지주·맷돌·세탁대 등이 남아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석조는 전체가 4각을 이루고 밑바닥과 각 면은 평평하게 다듬어졌다. 바닥아래와 윗부분에는 고인 물을 다른 곳으로 빼기 위한 구멍이 있는데, 특히 윗부분의 구멍이 주전자 꼭지모양으로 되어 있어 아름다운 곡선으로 흘러 내렸을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고려시대에 만든 작품으로 추측된다.
출처
문화재청
보문사지의 맷돌
보문정이라고 불리는 우물
보문사지 전체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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