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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장비,정보/등산칼럼

등산 역사의 시작(몽블랑)

by [대전]풀때기 2011.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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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역사의 시작(몽블랑)

등산이 스포츠로서 자리잡은 것은 1760년이 지나서였다. 이 해는 유럽 알프스 산맥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몽 블랑(Mont Blance ·4,807m)에 올라가 보려는 생각을 사람이 처음 가졌던 때이다.
등산은 알프스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그래서 '등산'을 가리키는 '알피니즘(Alpinism)'이란 말은 '알프스(Alps)'에서 나온 것이다. 등산의 역사는 어느덧 200년을 넘어섰다.

4,000m 짜리 알프스의 봉우리들은 물론이고, 히말라야 산맥의 8,000m가 넘는 봉우리 14개를 비롯한 지구 위의 이름 높은 산봉우리들이 모두 사람에계 정복된 오늘날, 등산 방법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준비물을 가지고 몇 달에 걸쳐 산을 오르던 이른바 '대원정시대'는 끝나고, 지금은 한두 사람이 가벼운 차림으로 하루 혹은 며칠에 산을 오르는 '알파인 스타일'등산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알파인 스타일이, 사실은 등산이 맨처음 시작된 때의 방법이라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1760년 어느 날, 알프스 기슭의 가난한 마을 샤모니, 이탈리아 제네바 태생 광물학자인 스무 살의 소슈르가 몽 블랑을 가리키며 외쳤다.
"누구든지 저 높은 산에 오르는 사람에게 많은 상금을 주겠소." 그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아무도 올라가 보지 못한 신비의 산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 그때까지 알프스의 산마을 사람들은 산꼭대기에 무서운 악마가 산다고 믿고 있었다. 소슈르는 과학의 힘을 빌어 여러 가지로 조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렸지만 사람들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지구위에 히말라야 산맥 같은 엄청난 산이 있다는 것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그 무렵, 사람들에게 있어서 산은 그저 두렵고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소슈르가 상금을 내건 지 26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산에 오르는 사람이 없이 세월만 흘렀다.
1783년 마침내 부우리라는 사나이가 등산대를 짜서 몽 블랑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 첫 모험은 나쁜 날씨탓에 실패했고, 1785년의 두번째 모험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이 두번의 도전이 헛된것만은 아니었다. 등산대원 중에 끼어있던 의사 파까르가 이때 겪은 일들을 밑거름으로 하여 뒷날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을 다졌기 때문이다.
샤모니 마을에는 파까르 말고도 쟈끄 발마라는 사나이가 몽 블랑에 오르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험한 바위산을 오르내려면서 수정을 캐며 살았는데, 몽 블랑에 올라 단번에 많은 돈을 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1786년 8월 7월 오후 3시. 파까르와 발마는 샤모니 계곡을 벗어나 몽 블랑으로 향했다. 그들은 밤 9시쯤 2,392m 높이에 닿아 비박(bivauac;천막을 치지 않고 그냥 자는 것)했다. 다음 날은 새벽 4시 30분부터 등반을 시작해 다섯 시간 만에 보송 빙하(氷河;얼음이 흘러내리는 강)와 타꼬나 빙하가 합치는 곳을 지났다.
자일(seil;등산용 밧줄)도 없이 크레바스(Crevasse;빙하나 눈쌓인 벌판이 갈라진 큰 틈새)를 건너고, 8월의 뜨거운 햇빛에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눈덩이 위를 지났다. 뒤이어 눈쌓인 벌판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언덕이 나타났다. 그들은 그 곳을 두 시간 만에 빠져 나갔다. 요즘 처럼 쉬타이그 아이젠(steigeisen;뾰족한 발톱 모양을 한 쇠, 신발 밑에 달아 얼음벽을 미끄러지지 않게 찍어 밟는다)도 없이 어떻게 그 미끄러운 눈 언덕을 뚫고 지나갔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언덕을 올라 거센 바람이 몸늘 날려 버릴 듯이 몰아치는 눈 벌판을 1km쯤 걸어갔다. 그곳의 높이는 3,900m였다. 무릎까지 눈에 푹푹 빠지는 곳을 럿셀(russell;앞선 사람이 눈을 파헤치고 단단히 다져 길을 만들며 나아가는 것)하며 한 발 한 발 떼어 놓는 강행군이었다. 앞장섰던 발마가 지쳐 쓰러지자 파까르가 그의 짐을 받아 앞으로 나섰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그들은 눈빛판을 벗어났다. 그다음은 산등을 따라 길게 이어진 바위 마루터기(로쉐 · 루지)사이로 몽 블랑의 북동쪽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이 길은 눈 벌판에서 몽 블랑 꼭대기에 이르는 루트(rout;등산길)가운데 가장 어려운 곳이었다. 하루 종일 햇볕 들 틈이 없이 얼음에 덮인 이곳 역시 자일과 아이젠 없이 가까스로 넘어섰다.
발마와 파까르가 4,807m의 몽 블랑 꼭대기를 밟은 것은, 1786년 8월 8일 오후 6시 32분으로, 2.392m의 비박했던 곳을 떠난 지 14시간 30분만에 이룩한 일이었다. 그들은 파까르가 지팡이로 쓰던 긴 막대기를 세우고 거기에 빨간 천을 매달았다.

아무런 지식이나 장비도 없이, 그렇다고 등산을 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얼음 강과 눈 벌판을 뚫고 몽 블랑 꼭대기에 우뚝 선 것은 참으로 장한 일이다.(물론 여기에는 꽤 좋았던 날씨도 한몫을 거들었다)
두 사람은 먹을 것이 떨어지고 잠이 모자란 데다 동상과 고산병(高山炳;높은 산에서 산소가 모자라고 기압이 낮아 걸리는 병)까지 겹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끝내 달빛 속을 4시간 30분이나 헤치고 별일없이 마을로 돌아왔다.
파까르와 발마가 몽 블랑에 오른 뒤로 등산에 대한 관심은 엄청나게 높아졌다. 기술과 장비도 하루가 다르게 좋아져 등산가들은 다투어 알프스의 험난한 봉우리들 - 몬테로자 ·융프라우 ·아이거·그랑드 조라스를 차례로 정복해 갔다. 1865년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봉우리 마터호른을 정복한 뒤, 눈을 중앙아시아로 돌려 히말라야 산무리에 도전함으로써, 등산의 역사를 화려하게 펼치게 된 것이다.

 

 

오스라 베네딕트 드 소쉬르 (1740 ~ 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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