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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장비,정보/등산칼럼

한국 등산의 역사 근대 이전,이후,안내등산

by [대전]풀때기 2011.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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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등산의 역사


1)근대등산 이전의 등산사(고대∼1920)
고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을 신격화하여 높은 산에는 잘 오르려 하지 않았다
신라의 화랑은 학문적 탐구의 대상으로 산에 올랐으며, 특히 삼국시대에 산은 종교적 활동의 산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명산 순례같은 유람 등산이 주된 등산 사조였다.
역사에 나타난 기록들을 살펴보면 1735년 박종의 백두산 유록,1830년 영 허즈밴드, 죠카스마 백두산 등정,

1861년 철종 시절 고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 우리 나라의 고대 등산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등산이 단순한생활 수단의 형태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되고 개척되어 이조말기에 이르러 서양 문물의 전래와 실학 사상의 보급으로 더욱 발전하였다.

 

 

2)근대등산 이후의 등산사
 (1)근대등산의 태동기(1920∼1930)
일제의 유화정책으로 탐승된 유람등산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자료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 보면 1925년 미국인 언더우드(원한경)의

인수봉 암벽등반, 1926년 조선 교육회의 백두산 등산 기록,1926년 한국인 임무와 영국인 아처(공사관)의 인수봉과 도봉산 암벽등반이 있었으며,

1925년전후하여 서구적인 알파니즘과 순수한 등산운동 기록들이 영화와 서적으로 보급되었다.
동시에 서울에 살고 있던 서양인들에 의해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에서 암벽등반이 시작되었으며, 이같은 외국인들의 근교 암벽등반은

한국 근대 산악운동의 태동에 직.간접 많은 영향을 미쳤다.

 

  (2)근대 등반의 형성기(1930∼1945)
이 시기는 외국의 근대화 등산운동을 도입한 시기라고 볼수 있다.
이때의 등반 기록은 1931년 1월 일본인 반산달웅과 반소에 의해 금강산 비로봉에서 스키등산이 있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동계등반이다.

1931년 조선 산악회의 창립이 일본인을 중심으로 있었다.
일본인 중심이지만 순수산악회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며 회지로 조선 산악을 창간 하였다.
1935년 1월 경도제대 산악부의 백두산 등반,1936년 1월 경성제대 산악부가 한라산 등반을 하였으나 등반중에 전체 대원이 조난을 당하였다.
이 조난 산고가 우리나라 최초의 조난 사고 기록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회는 1937년 창립된 백령회로 순수한 한국인들로만 조직 되었다
1938년 조선 산악회에 의해 금강산 집선봉 암벽 슬라브 초등, 1942년 백령회에서 적설기 백두산 마천령 산맥 연봉경유 종주 등반이 있었다.
암벽등반은 서울 근교의 북한산 인수봉과 백운대를 중심으로 많은 코스가 개척 되었고, 금강산에는 접선봉을 위시하여 많은 암벽이 초등 되었으며,

답사 위주의 방식에서 탈피 근대적 등반운동이 전역에 싹트기 시작아였으며 한국적인 알파니즘이 형성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3)근대 등반의 발전기(1945∼1960)
해방과 더불어 이 땅은 새로운 희망으로 충만할 때 1945년 9월 15일 백령회 맴버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산악회가 사회단체 2호로 창립되었다.

그후 1946년에 부산지부, 경북지부가 창립되었으며1947년에는 서울대, 세브란스의대, 한양공대를 주축으로 학생산악연맹이 창립되었다.
또 학생스키연맹이 발족되어 본격적인 근대 등산 운동이 전개 되었다.
1946년 3월 제1차 제주도 종합 학술 조사등산, 태백산맥 학술 조사 등반,1947년 8월 제1차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 등산,
1956년 1차 동계 한라산 극지 등반이 한국산악회에 의해 이루어졌고,
1962년 대한산악연맹이 창립되어 산악계는 양대 산맥체계로 운영 되기 시작 했다.
특히 1955년 서울 문리대 산악부의 설악산 천불동 최초등반,
슈타이맨 글럽의 동계 설악산 최초등반등 적설기 등반 최초등정의 시조를

국내 산악계에 심게 되었다.

 

(4) 히말리즘과 현대 등반(1960∼현재)
이때의 주요한 변천은 해외등반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1960년 하켄클럽의 대만 옥산 원정을 시작으로 1962년 경희대 산악부의 히말라야 정찰 등반, 

1964년 동국대와 한국 산악회의 일본 북 알프스 등반이 이루어 졌으며, 암벽등반은 프리클라이밍과 인공등반의 조화 속에 선우중옥씨에 의해

선인봉 박쥐 코스와 인수봉 귀바위 A, B코스가 개척되었으며 설악산 공룡능선 역시 선우중옥씨 파트에 의해 개척 되었다.
해외로 뻗으려던 국내 산악 운동이 1965년3월 네팔의 입산 금지령으로 주춤 했으나, 1969년해금령에 따라 다시 히말라야로 눈을 돌리게 도었으며,

1962년 박철암의 아울라기Ⅱ 정찰,1969년 7월 한국산악회의 츄렌히말 정찰대 파견, 1970년 김정섭 원정대의 츄렌히말 등정,1971년 김정섭 대의

마나슬루 원정(실패), 1971년 대한산악연맹의 로체샬 원정이 고소장애 및 조난으로 실패, 1972년 김정섭 원정대가 마나슬루에 재도전하였으나

히말라야 사상 두번째로 큰 조난사고를 당하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1977년 9월 15일 12시50분 김영도 대장이 이끈 등반대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등반을 준비한지 6년만에 정상에 태극기를 꽃아

한국인의 의지를 높일 수 있었다.(등정자: 고상돈)
이와 같은 해외 등반 추세와 함께 60년 초에는 이후 내적으로는 각 산악단체의 활발한 등반 활동이 근대등산을  이땅에 토착화 시켰으며,

외적으로는 서구의 등반 사조에 적극적으로 부흥하면서 과학적이고 체곚거인 훈련을 통하여 히말라야 및 전세계 곳곳에서 좋은등반 기록을

갱신 하면서 한국의 등반 기술을 한단계 높은 곳을 이끌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 안내 등산의 역사


등산은 등산을 가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등산에 대한 정보가 빈약하던 시절인 1970년대 초에 등산동호회 단체에서 시작하였으며,

등산 홀동계획을 신문, 잡지등 홍보 매체에 게재하여 등산인을 모집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산행지로 이동하여 산행을 안내하는 선도 위주에

등산활동으로 수천개에 안내 등산 모집 단체가 활동하는 등산활동에 한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안내 등산은 등산에 대한 기본상식 교육, 등산활동 선도 위주에 초기단계에서 시작하여 산행지 확대를 위한 개척 등산시대, 대중적 등산 영역으로

자리하는 정착기를 거쳐 백두대간기라 부르는 개화기, IMF라는 사회적 전환기를 맞으며 등산단체가 난립하는 혼란기를 거치게 되었다.
혼란기를 지나 인터넷 시대에 접어 들면서 등산 정보에 범람과 인터넷 등산동호회라는 카페 단체들이 안내 등산에 영역으로 잠식하기 시작했으며

동호인 단체 위주로 활동하던 안내 등산단체들도 무한 경쟁에 상업화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생존경쟁에 상업화로 산은 상품화 되었으며 알피니즘 등산 정신은 이기적 개인주의 성향으로 변모하여 자연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등산에

순수 정신이 위협 당하는 어려운 상황에 산문화가 자리하게 되었다.
선도 위주에서 이제 자율 등산에 시대로 변화하여 산이 이용과 보호에 대립으로 향하고 있는 현실에서 상생에 아름다운 질서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많은 등산인이 마음을 모아야 할 시기라 생각한다.

 

 1) 개척기 (1970∼1980)
고등학교 산악부 출신 일부가 산악회를 구성하여 암벽 등반에서 탈피보행 위주에 등산활동을 시작 하면서 안내 등산이 잉태 되었으며,

점차 참가회원이 확대 하면서 다양한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대 도시 근접지역 지역에 등산로를 개척 등산인을 선도하는 등산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기본등산 상식에 교육, 선두,

중간, 후미 운행 리더 배치로 진행되는 전형적인 대열 형성 선도 등산형태로 산행이 되었다.
등산후 집단 취사가 이루어 질만큼 참가회원들 유대가 강했으며 엄격한 등산 예절과 협동정신이 살아 있었다.

 

 2)정착기(1980∼1997)
모체 단체에서 파생단체가 생기기 시작하여 안내 등산이 활성화 되었으며, 각 단체간 엄격한 기본 원칙과 유기적인 협조체계 유지로

등산 활동에 안정성이 상당 부분 정착되여 많은 등산인이 안내 산행에 편리함을 피부로 느껴 참가회원수가 팽창 되었으며,

지역별로 안내 등산 단체 연합회가 결성 되어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관광버스에 공급 원활과 안내 등산에서 배출된 등산 리더 역량 배가로 지역 등산 친목단체, 학교 동문단체, 직장동호인단체등 많은 등산 단체가

창설되게 되었으며,정당 단체들도 안내 등산형태로 등산 단체를 결성하는등 등산인 춘추 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등산후 집단 취사가 사라지고 개인별 도사락이나 매식 형태로 전환 되었으며, 순수 자연주의에서 이기적인 성향으로 등산문화가 변모하기 시작 하였다.
등산 역량이 높아진 등산인 중심으로 백두대간 종주 안내산행이 이루어지기 시작 했으며, 명산중심에서 종주 개년 중심으로 안내 등산 개념이 변화하기

시작 하였으며, 기관 및 직장에서 산행을 안내단체에 위탁하는 등산형식이 확대 되기 시작하였다.

 

 3)전환기(1997∼2006)
IMF라는 사회적 변환기를 맞으며 등산 안내를 직업으로 선택하여 활동하는 산악회가 지역중심으로 난립하기 시작하여 기존에 안내 등산 단체와

대립하여 등산이 상업적으로 번창하기 시작하였으며, 식사 제공등에 무한적 경쟁으로 인하여 안내 등산에  본색이 변화하여 이기적 등산 풍토가

안내 등산문화로 일반 등산문화로 팽창 하기에 이르렀으며, 주5일 근무제에 확산과 웰빙 사조로 등산 형태에 다양성이 대두 되게 되었으며,

인터넷을 통한 등산 정보에 범람과 등산인 능력 확대로 자율 등산이 도입되기 시작 하였다.
안내 등산 단체에 난립으로 명산 집중 현상 가중과 등산예절 실종등 무분별한 등산문화가 문제점으로 대두 되었으며 , 등산 안내 자격화 문제가

기존 안내 등산단체에서 제기 되게 되었다.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안내 모집 등산단체 6,000개,인터넷 카페 등산단체15.000개가 안내 위주에 등산 단체로 추정 되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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