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산이 좋아 산을 찾아 산에 마음을 두어...
산행/100대 명산

경남 남해 금산(錦山) 705M -보리암-

by [대전]풀때기 2012. 3. 14.
728x90

 

 

경남 남해(南海) 금산(錦山) 705M -보리암-

(국토지리정보원의 공식적인 금산 높이는 705M 기존 681M는 잘못된 높이임)

 

 

 

산행코스: 주차장 -> 금산탐방지원센터 -> 쌍홍문 -> 제석봉 -> 상사바위(상사암) -> 단군성전 -> 금산 정상 -> 보리암

              -> 쌍홍문 -> 주차장

  

산행거리: 6 km 내외

산행시간: 3시간 9분 (AM 11:22 -> PM 02:31)

산행속도: 쉬엄쉬엄

산행난이도: 하

  

소요된 음료: 생수 800ml

 

참가자: 풀때기 포함 한밭산사랑 산악회 42명 내외 (관광버스 1대)

 

회비: 17,000원 

 

 

산행일정

 

주차장       AM 11:22

사선대       PM 12:06

쌍홍문       PM 12:07

장군암       PM 12:09

일월봉       PM 12:16

제석봉       PM 12:17

흔들바위    PM 12:23

금산산장    PM 12:24

좌선대       PM 12:39

상사바위    PM 12:44

헬기터       PM 01:00

단군성전    PM 01:03

화엄봉       PM 01:09

금산 정상   PM 01:19

봉수대       PM 01:21

모노레일    PM 01:29

보리암       PM 01:30

만불전       PM 01:33

산신각       PM 01:35

3층석탑      PM 01:38

선은전       PM 01:47

음성굴       PM 01:58

주차장       PM 02:31

 

 

 

경남 남해 금산 705M 

 

 

이칭별명 : 개암산 , 보광산
소재지: 경산남도 남해군 상주면 ,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종목: 명승 제39호

정의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삼동면·이동면에 걸쳐 있는 산.

개설

한려해상국립공원(閑麗海上國立公園)에 속하는 금산(錦山)은 해발고도 681m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칭 유래

금산을 소금강(小金剛) 또는 남해금강(南海錦江)이라고한다. 또는 금강산을 개골산(皆骨山)이라 하는데 비유하여 금산을 개암산(皆岩山)으로 부르기도 한다.

본래 신라 원효대사(元曉大師)의 기도처로서 보광산(普光山)이라 하였는데,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하기 전에 이 산에서 수도하면서 기원한 결과 그 이상을 달성하여 왕좌에 오르게 되자 은혜를 갚기 위하여 비단 ‘錦(금)’자를 써서 ‘普光山(보광산)’에서 ‘錦山(금산)’으로 바꿔 부르게 된데서 지금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자연환경

금산(681m)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온통 기암괴석들로 뒤덮인 38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지질은 중생대 퇴적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기암괴석을 형성하여 금산삼십팔경(錦山三十八景)이라 불릴 정도로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정상에서는 남해에 있는 크고 작은 섬과 넓은 바다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어 삼남지방의 경승명산지로 손꼽힌다.

현황

정상에는 강화도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인 보리암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쌍홍문(雙虹門)·사선대(四仙臺)·음성굴(音聲窟)·상사암(相思巖) 등이 있어 해마다 많은 등산객과 관광객이 찾는다.

금산의 38경은 망대, 문장암(文章岩), 대장봉, 형리암, 탑대, 천구암, 이태조기단(李太祖祈壇, 이씨기단), 가사굴, 삼불암, 천계암, 천마암, 만장대, 음성굴(音聲窟), 용굴, 쌍홍문, 사선대, 백명굴, 천구봉, 제석봉, 좌선대, 삼사기단(三師祈壇), 저두암, 상사바위, 향로봉(香爐峰), 사자암(獅子岩), 팔선대, 촉대봉(燭臺峰), 구정암, 감로수, 농주암, 화엄봉, 일월봉, 흔들바위, 부소암, 상주리 석각, 세존도, 노인성, 일출경 등이다.

 

참고문헌

『남해군지(南海郡誌)』(남해군지편찬위원회, 1994)
남해군청(http://www.namhae.go.kr/)

 

 

남해 금산 지도

 

 

 

 

남해 금산 주차장

 

AM 11:22

 

 

 

 

 

주차장 사용료

 

비수기 소형 4000원 , 중형 4500원

성수기 (4~5월,7~8월,10~11월) 소형 5000원 , 중형 5500원

 

 

 

 

 

 

 

 

 

 

 

산행 시작

 

 

 

 

 

 

 

 

 

 

 

 

 

 

 

 

 

 

 

 

 

 

 

약수터 (임시폐쇄)

 

AM 11:47

 

 

 

 

 

 

 

 

 

 

 

 

 

 

 

 

 

 

 

 

 

사선대

 

금산 제16경

 

동서남북에 흩어져 있는 네 신선이 이 암봉에서 모여 놀았다하여 사선대

 

PM 12:06

 

 

 

 

 

 

 

 

 

쌍홍문

 

금산 제15경

 

금산의 관문이며 옛날에 천양문이라 불러왔으나 신라중기 원효대사가 두 굴이 쌍무지개 같다고 하여 쌍홍문이라 부른다

 

PM 12:07

 

쌍홍문 전설

 

옛날 석가세존이 금산에서 깨우침을 얻은후 돌로 만든배를 타고 인도로 가기 위해 무념무상으로 하산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하산길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세존이 가까이 가자 갑자기 그 커다란 바위에 무지개 같은 구멍(쌍홍문)이 생기며 가는 길을
열어 주어 이 길을 통해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석가세존이 인도로 갔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실제로 세존도 한복판에는 마치 커다란 원을 그려 뚫은 듯한 해상동굴이 있음

 

 

 

 

 

 

 

 

 

 

벽에 있는 세개의 구멍에 돌을 한번씩 던져 넣으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바위 구멍이 나 있다

(사진상 중앙 좌측)

 

 

 

 

 

 

 

 

 

 

 

 

 

 

 

 

 

 

 

 

 

 

장군암

 

장군이 검을 짚고 봉을 향하여 서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장군암이라 하였으며 금산의 첫 관문인 쌍홍문을 지키는 장군이라 하여 일명 수문장이라고 한다

 

PM 12:09

 

 

 

 

 

 

 

 

 

 

 

 

 

 

 

 

 

 

 

 

 

 

 

 

 

 

일월봉

 

화엄봉 왼쪽에 2개의 바위가 층암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日" 자형이고 멀리 떨어져 전체를 보면 "月"자로 보이기 때문에 일월봉이라 부른다

 

PM 12:16

 

 

 

 

 

 

 

 

 

 

 

제석봉

 

금산 제19경

 

제석천이 내려와 놀다갔다하여 제석봉이라 부른다

(불교에서 제석천은 부처를 좌우에 모시는 불법을 지키는 신)

 

PM 12:17

 

제석봉에서 바라본 조망

 

 

 

 

 

 

 

 

 

 

 

 

 

 

 

 

 

 

 

 

 

 

 

 

 

 

 

 

 

 

 

제석봉에서 바라본 보리암

 

 

 

 

 

 

 

 

 

 

 

 

 

 

 

 

 

 

 

 

 

 

 

 

 

 

 

 

 

 

 

흔들바위

 

PM 12:23

 

 

 

 

 

 

 

 

 

 

 

 

 

금산산장

 

PM 12:24

 

금산산장은 한때 비구니가 거처하던 자그마한 암자였다. 그러던 것이 비구니가 떠난 뒤 비워져 있다가 100여년 전쯤 그 암자를 사들인 이가 집을 들였단다. 당시 ‘부산여관’이란 간판을 달고 보리암을 찾은 신도들이나 행락객들에게 방을 내주거나 밥을 해줬단다. 주인은 4대에 걸쳐 한 자리를 지키며 영업을 해오고 있다. 여전히 방을 내주고 있긴 하지만 시설이 허름한데다 보리암 입구까지 찻길이 나면서 구태여 숙박을 할 이유도 없어졌으니 방은 거의 비어있다. 그 대신 간간이 찾아드는 관광객들에게 부침개를 부쳐주거나 밥을 해주고 있다.

금산산장에서 가장 이름난 것이 청주와 막걸리다. 바위산의 정상 부근에 집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바위 사이로 솟는 물이 있기에 가능했다. 신기하게도 산 정상 부근인데도 집 뒤의 코끼리바위와 돼지바위 사이에서는 물이 났다. 산장지기는 이렇게 솟는 물로 손수 누룩을 띄워서 막걸리와 청주를 빚어낸다. 막걸리를 담가서 맑은 윗술을 떠낸 쌉싸래한 맛에 청주의 향이 특히 짙다고 한다

 

문화일보 2010년 12월 29일자 발췌

 

 

 

 

 

 

 

 

 

 

 

 

 

 

 

 

 

 

좌선대

 

금산 제20경

 

옛날 신라의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등 삼사가 수도좌선을 하였던 자리라고 전해진다

 

PM 12:39

 

 

 

 

 

 

 

 

 

 

 

 

 

 

 

 

 

 

 

 

 

 

 

 

 

상사암(상사바위)

 

금산 제27경

 

옛날 남해 상주에 살던 한 사내가 이웃에 사는 여인에게 반하여 상사병에 걸려 사경을 이르게 되자 이를 알게 된 여인이 이곳에서 그 사내의 순수한 마음을 받아들여 사랑을 이루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PM 12:44

 

 

 

 

 

 

 

 

 

상사암(상사바위)에서 바라본 조망

 

 

 

 

 

 

 

 

 

 

 

 

 

 

 

 

 

 

 

 

 

 

 

 

 

 

 

 

 

 

 

 

 

 

 

 

 

 

 

 

 

 

 

 

 

 

 

 

 

 

 

 

 

 

 

 

 

 

 

 

 

 

 

 

 

 

 

 

 

 

 

상사바위 전체모습

 

 

 

 

 

 

 

 

 

 

 

 

 

 

 

헬기장

 

PM 01:00

 

 

 

 

 

 

 

 

 

 

 

 

 

단군성전

 

1995년 건립

 

PM 01:03

 

 

 

 

 

 

 

 

 

 

 

 

 

 

 

 

 

 

 

 

 

 

 

 

 

 

 

 

 

 

단군성전 내부

 

 

 

 

 

 

 

 

 

 

 

 

 

 

 

화엄봉

 

금산 제31경

 

원효대사가 이 바위에서 화엄경을 읽었다하여 화엄봉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PM 01:09

 

 

 

 

 

 

 

 

 

남해 금산 705M

 

PM 01:19

 

 

 

 

 

 

 

 

 

 

 

 

 

 

 

 

 

 

 

 

 

남해금산봉수대 [ 南海錦山烽燧帶 ]

 

경상남도 기념물 제87호.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면, 곤남군에는 봉화가 세 곳 있는데, 금산봉화는 남해도 동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본도(本道) 소흘산봉화와 연락한다고 하였다.

『경상도지리지』에 보면, 금산연대봉화는 남해도 동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남해 소흘산연대봉화와 연락하는데, 거리가 육로로 30리라고 하였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보면, 남해 금산봉화는 북쪽으로 진주 흥선도 대방산봉화, 서쪽으로 현(縣) 남쪽 소흘산봉화·원산봉화와 연락한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남해 금산봉화는 북쪽으로 진주 대방산봉화, 서쪽으로 소흘산봉화·원산봉화에 연락한다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전국 봉수의 주요 간선은 5개 직봉으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제2거(炬)는 동래­서울 간으로 직봉 44개와 간봉 110개로 이루어졌다.

제2거 봉수에는 10개의 간봉 지선이 있다. 남해 금산에서 첫 봉화를 피운 간봉은 진주 대방산→각산→사천 안현산 등을 거쳐 충주의 망이산 직봉으로 연결되었다. 이처럼 금산봉수는 처음 봉화를 피우는 경상도 남해안의 중요한 봉수의 하나였다.

봉수대는 금산 상봉인 망대에 있다. 설치 연대는 고려 중엽으로 추측되고 있다. 높이는 4.5m, 둘레는 26m의 방대형으로 규모가 큰 편이다. 이곳에는 오장 2명과 봉졸 10명이 있었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상태이다. 조선시대 남해안의 봉수제도와 봉수대의 실태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대동지지』
『한국의 봉수제도』(국방군사연구소, 1997)
『경남문화재대관-도지정편-』(경상남도, 1995)
『남해군지』(남해군, 1994)
「통신수단의 관리」(최완기, 『한국사』24, 국사편찬위원회, 1994)

 

 

 

 

 

 

 

 

 

 

봉수대(망대)

 

금산 제1경

 

PM 01:21

 

 

 

봉수대에서 바라본 조망

 

 

 

 

 

 

 

 

 

 

 

 

 

 

 

 

 

 

 

 

 

 

 

 

 

 

 

 

 

 

 

 

 

 

 

 

 

 

 

 

 

 

 

 

 

 

 

 

 

 

 

 

 

 

 

보리암으로 물품을 나르는 모노레일

 

PM 01:29

 

 

 

 

 

 

 

 

 

 

 

 

 

보리암(菩提庵)

 

PM 01:30


보리암은 누가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조선 숙종 20년(1694)에 쓴 『보리암중수기』에 따르면 보조국사가 세운 뒤 정유재란으로 불탄 것을 선조 40년(1607)에 승려 신찬이 고쳐 지었고, 효종 1년(1650) 스님들이 힘을 모아 다시 지었다고 한다. 보리암이라고도 하는 이 암자는 1983년 주지 성묵스님이 현 법당을 복원하였다. 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장식한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부인 흥양 이씨가 순절한 곳이기도 한데 임진왜란 당시 흥양 이씨는 왜적에게 쫓기자 절벽에서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지금도 암벽에는 헌종 6년(1840)에 담양부사 조철영이 이 사실을 새겨 놓은 명문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매우 규모가 큰 것으로서 1980년에 주지 진공(眞空)이 신도 묘월화(妙月華)와 법계성(法界性) 등의 도움을 받아 2억원의 공사비로 완공한 것이며, 당시 목재의 운반은 미 공군의 헬리콥터 지원을 받아서 옮겨왔다고 한다.

 

특기할 만한 문화재는 없으나, 이 절에는 지름 1.2m, 깊이 0.7m 정도의 큰 솥이 있다. 순창에 살았던 기생이 사람들을 동원하여 절아래에 있는 굴까지는 운반하였으나, 그 앞의 절벽 때문에 더 이상 옮길 수 없어 애를 태웠는데, 이튿날 보니 불력(佛力)으로 솥이절에 옮겨져 있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 바위 꼭대기 가까운 절벽인데도 이 절에는 많은 샘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이 샘은 부정을타면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 파계승이 샘가에서 닭을 잡아먹은 일이 있는데 석 달 동안 물줄기가 끊어져 물이 나오지 않아 아랫동네에서 길어 와서 먹은 일이 있었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명산고찰(名山古刹) 따라』(이고운·박설산, 신문출판사, 1987)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권상로 편,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문화재청 자료

 

보리암 약수터

 

 

 

 

 

 

 

 

 

 

 

 

 

 

 

 

 

 

 

 

 

 

 

 

 

 

 

 

 

 

 

만불전

 

 

 

 

 

 

 

 

 

 

 

 

 

 

 

 

 

 

 

 

 

 

 

 

 

 

 

 

 

 

 

산신각

 

PM 01:35

 

 

 

 

 

 

 

 

 

 

 

 

 

 

 

 

 

 

 

 

 

 

 

 

 

 

 

 

 

보리암전 삼층석탑

 

종목: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

 

보리암이라는 암자와 가까운 남해금산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어, ‘보리암전삼층석탑’이라 불리고 있는 3층 석탑으로, 주변의 경치가 너무나 빼어나 더욱 유명해졌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을 얕게 조각하였다. 위층 기단은 아래층에 비해 폭이 크게 줄었다. 탑신의 몸돌 각 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가지런히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처마는 직선을 유지하다 네 귀퉁이로 갈수록 두툼해지면서 위로 솟았다. 꼭대기에는 보주(寶珠:구슬모양의 장식)만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허태후(김수로의 왕비)가 인도에서 가져온 사리를 원효대사가 이곳에 모셔 두었다 하나, 두꺼운 지붕돌 과 3단의 지붕돌받침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참고자료

문화재청

 

 

 

 

 

 

 

 

 

해수관음보살상(海水觀音菩薩像)

 

연꽃대좌 위에 관음보살이 정병을 들고 서 있다. 보관에는 석가모니불 좌상이 새겨져 있다. 옷주름표현이 바람에 날리는듯하며 탄력감이 느껴지는 사실적인 보살상이다. 1989년에 제작

 

 

 

 

 

 

 

 

 

 

 

 

 

 

 

 

 

 

 

 

 

 

 

 

 

 

 

 

 

 

 

 

 

 

 

 

 

 

 

 

 

 

 

 

 

 

 

 

 

 

 

 

선은전(태조 이성계가 기도한곳)

 

대한중흥송덕축성비와 남해금산영응기적비 내용

 

금산영응기적비(錦山靈應紀蹟碑)는 높이2m, 폭60cm로 대한중흥공덕축성비(大韓中興公德祝聖碑)와 같이 조선시대 유물로 전주이씨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百日祈禱)를 하던 중 산신(山神)의 영험(靈驗)에 의하여 보위(寶位)에 오르셨다는 전설(傳設)이 깃든 유적(遺蹟)이다. 위치는 보리암(菩提庵) 탑대(塔臺)에서 바로 건너다보이는 삼불암(三佛岩) 아래에 있다. 천하(天下)를 장악(掌握)하려는 큰 뜻을 품은 태조 이성계는 전국(全國) 명산(名山)을 찾아 산신기도(山神祈禱)를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마침내 금산 산신(錦山山神)이 호응(呼應)하여 등극(登極)하게 되자 영구불망(永久不忘)의 명산(名山)이라 하여 보은(報恩)의 뜻으로 보광산(普光山)을 금산(錦山)으로 개칭(改稱)게 하였다고 전(傳)한다. 이 비석(碑石)은 광무 7년(1903) 5월 11일에 그 유적(遺蹟)을 기념(記念)하기 위하여 종일품(從一品)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찬정(贊政) 윤정구(尹定求)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글을 짓고 써 건립하였다. 의정부 찬정 윤정구가 고종의 명을 받아 찬한 두 개의 비석은 선은전 내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비석의 전면에 각각 ‘남해금산영응기적비’, ‘대한중흥송덕축성비’ 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의 찬자인 윤정구는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1875년(고종12) 별시에 급제하여 이후 관로에 올라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던 인물이다. 그는 김윤식(金允植) 등이 을미사변에 관련되었으므로 극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상소하기도 하였고 명성황후의 장례 때에는 궁내부협판으로 대신서리가 되어 장례를 총지휘하였다. 광무 연간에는 고종의 측근으로 궁내부 소속의 여러 아문의 장관을 역임하며 주로 왕실 사무를 관장하였다.

출처

정의연 향토사학자

 

 

 

 

 

 

 

 

 

 

 

 

 

 

 

 

 

 

 

 

 

 

 

 

 

 

 

 

 

 

 

 

 

 

 

 

 

 

 

 

 

 

 

 

 

 

 

 

 

 

선은전에서 바라본 보리암

 

 

 

 

 

 

 

 

 

 

 

 

 

 

 

음성굴

 

금산 제13경

 

돌로 바닥을 두드리면 장구소리가 난다고 하여 음성굴이라 하며 그 소리가 사람들을 노래를 부르게 하고 춤을 추게 한다는 전설이 있다

 

PM 01:58

 

 

 

 

 

 

 

 

 

 

 

 

 

 

 

 

 

하산길(원점회귀)

 

 

 

 

 

 

 

주차장

 

산행종료 PM 02:31

 

버스 출발 PM 03:35

 

삼천포 어시장 PM 04:25

 

대전 출발 PM 05:20

 

대전 IC도착 PM 07:57

 

롯데 하차 PM 08:27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