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들의 황색인종 깔보기
1950년 히말라야 8천m 고봉 등정시대의 막이 열리면서
서양의 백인들은 앞다투어 하나 둘 씩 고봉들을 자기들 것으로 정복해나갔다.
프랑스 사람들은 안나푸르나(8091m)를,
영국은 에베레스트(8848m)를,
독일은 낭가파르바트(8125m)를, 이탈리아는 K2(8611m)를,
스위스는 로체(8516m)를,
오스트리아는 브로드피크(8047m)를,
미국은 가셔브룸Ⅰ봉(8068m)을
자기들의 산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때의 등반양상은 열강들의 식민지 영토 쟁탈전을 방불케 하는
정복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처럼 초창기 히말라야는 백인들의 독점적인 활동무대였다.
엄청난 경비가 소요되는 8천m 고산등반은 한 국가의 국력과 비례한다.
당시 신생 독립국인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던 시절이었으며,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허덕이던 시기였으니
8천m 해외원정은 꿈도 꿀 수 없던 시절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서구열강들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신생 독립국으로 첫발을 내딛고 있을 때였으니
아시아권의 유색인종들은 백인들의 각축장이던 8천m를 감히 넘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2차 대전 패전국 일본만은 달랐다.
국운을 걸고 세 차례 도전한 끝에 1956년에 마나슬루(8163m)를 자기들의 산으로 만들면서
동양인 최초의 8천m 처녀봉을 오르는 쾌거를 이룩한다.
일본은 이미 1905년에 일본산악회를 탄생시켰고,
1921년에는 마키 유코가 알프스 아이거의 미텔레기 리지를 초등하고,
1936년에는 일개 대학산악부(릿교대학)가 히말라야의 처녀봉 난다코트(6861m)를 초등정할 정도로
일찍부터 히말라야의 문을 연 나라다.
이처럼 아시아권에서는 가장 빠르게 등산 활동을 펴온 나라이니만치
그동안 축적된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패전국 일본이 마나슬루 원정을 추진할 때는 먹고 살기조차 어렵던 시절이었다.
점령군으로 상륙한 미군의 군정통치를 받고 있던 때였다.
당시 2차 대전 승전국들이 8천m봉에 올라 국력을 과시하자
일본도 처녀봉 하나를 정복하여 패전으로 위축된 국민감정에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속셈이 도사리고 있었다.
비록 미국에 패전하여 그들의 통치를 받고 있지만,
아직 8천m 한 봉우리도 오르지 못한 승전국 미국의 자존심을 꺾어
국민의 사기를 드높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일본의 마나슬루 초등정은 점령군의 콧대를 꺾는 쾌거였다.
그러나 같은 아시아권에 속한 중국은 1955년까지만 해도
등산의 후진성을 면치 못하던 나라였다.
그런 중국이 1960년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고 발표했을 때
영국인들은 <알파인저널>을 통해 즉각 등정의혹을 제기했다.
고소등반경험이 부족하고 미숙한 등반기술을 지닌 중국의 등산대가 등정사진도 없이
에베레스트 북릉-북동릉 루트로 등정했다는 주장은 일단 의혹을 살만하지만
영국인들이 집요하게 등정의혹을 제기한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영국은 1921년부터 17년에 걸쳐 7차례나 에베레스트를 북방루트로 시도하면서
경험을 축적해왔지만 번번이 북방의 티베트 측 등반에서 실패만 거듭해왔다.
등산종주국을 자부하는 그들의 자존심이 이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동안 쌓아온 북방루트의 소중한 체험과 자료가
1950년 중공의 티베트 침공으로 ‘죽의 장막’에 차단되었기 때문에
북방 티베트 쪽에서의 등반은 막을 내리고 만다.
이때는 동서냉전기의 절정을 이루던 시대였으며
공산권인 중국은 서방세계와의 교류를 폐쇄하고 있었다.
북방루트는 자신들의 산악영웅 '조지 말로리'가 실종된 곳이며,
유능한 알피니스트 '에드워드 페릭스 노턴'이 난공불락의 요새 세컨드 스텝을 피해
그레이트 쿨르와르까지 북벽을 횡단하는 과감한 기록을 세웠고,
영국을 대표하는 에릭 십튼, 프랭크 스마이드, 해럴드 윌리엄 틸먼 같은
쟁쟁한 스타급 산악인들이 줄줄이 패퇴한 루트였다.
이런 곳을 미숙한 등반기술을 지닌 중국대가 사람의 어깨로 등반자를 받쳐
인간사다리를 만들어 세컨드 스텝을 돌파하며 등정했다는 소식은
영국인들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중국대는 새벽 4시에 정상에 올라 중공기와 마오쩌둥의 석고흉상을 눈 속에 묻고
주석에게 선물할 암석 표본을 수집하여 하산했다.
그들이 8700m지점에 이르렀을 때 날이 밝아 정상을 향하여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후일 이 사진은 1933년 영국의 웨이저가 퍼스트 스텝 부근에서 정상을 향해 찍은 사진과
1953년 초등자 힐러리가 정상에서 북동릉을 향해 찍은 사진과 지형의 특징을 비교한 결과
중국대의 사진이 세컨드 스텝 위쪽에서 촬영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중국대가 세컨드 스텝을 돌파했다면 정상까지의 장애물 없는 수평거리 500m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중국대의 등정은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영국의 오만한 산악인들은 중국대의 사진에 파노라마 전경이 없다는 이유로
항공사진일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중국대의 사진이 촬영된 고도를 비행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비행고도였다.
1975년 중국대는 또 한 차례 북방의 티베트를 통하여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이번에는 세컨드 스텝 상부에 알루미늄 사다리를 설치한 후 넓이 90cm, 길이 12m의
세계의 지붕에 올라 중국 공산당 기를 꽂고 사진을 촬영한 후 측량용 삼각가(三脚架)를 설치했다.
이들은 이 등반에서 마오쩌둥 사상 실천이라는 슬로건아래 410명이라는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한국전쟁에서 인해전술을 구사하던 방법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을 성공시켰다.
이 등정 또한 서방세계의 백인들은 의심을 했지만
같은 해 영국의 크리스 보닝턴이 이끈 남서벽 등정팀이
정상에 설치한 중국대의 측량용 알루미늄 삼각가를 발견하고 의혹을 풀었으며,
중국대의 1960년 등정도 인정했다.
중국대의 첫 에베레스트 등정은 국가별 순위로 보면 영국, 스위스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 등정국가로 기록된다.
이후 중국은 아시아권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8천m 처녀봉 시샤팡마(8027m)를 1964년에 등정했다.
백인들의 인종적인 편견은 등산의 세계에서도 가끔 표출된다.
백인들은 유색인종의 성과에 대해 이를 폄훼(貶毁)하고 깔아뭉개는 고약한 버릇이 있으니
그야말로 그들이 내세우는 우월감의 표출 방법인 듯하다.
상대가 강대국 미국이었다면 어떤 태도로 대응했을까. 이런 일은 중국대만이 겪은 것이 아니다.
1977년 한국대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것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성과였다.
한국은 세계 10번째의 에베레스트 등정국가가 되었고
등정자는 세계에서 14번째의 순위를 기록했다.
이때도 영국의 산악전문지 <클라이머>(1978년 2월호)는
한국대의 등정 성과를 비방하는 기사를 실어 우리를 분노케 했다.
이 기사를 기고한 사람은 네팔 현지에서
각국의 원정대에게 포터와 셰르파를 모집해주는 업무를 대행하는 업체의
영국인 '마이크 체니'라는 사람이다.
한국대의 등정 성공은 대원들의 실력보다는
셰르파들의 전격적인 도움으로 성공했다고 보도하여
셰르파의 힘으로 올라갔다는 인상의 글을 실었다.
영국의 힐러리가 에베레스트를 초등할 때 많은 셰르파들의 도움을 받고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1975년 영국대의 경우는 한국보다 더 많은 숫자의 포터와 셰르파를
고용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잊어버린듯하다.
한국대가 셰르파들의 노임 4천루피를 체불한 채 귀국했다는 악의에 찬 모함성의 글을 싣기도 했다.
당시 노임은 셰르파와 포터의 고용을 대행해주는 업체의 운영자인
영국인 마이크 체니라는 사람이 고용한 포터 책임자가
포터들에게 지급할 임금을 가지고 도망쳤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며,
이에 대한 책임은 그를 고용한 영국인 체니가 책임져야할 일이다.
1997년 가셔브룸Ⅳ봉(7925m) 서벽에서 등로주의의 전형을 보여준
한국대의 선전은 놀라운 성과였다.
이 산은 높이에서도 결코 만만치 않은 산이다.
8천m에서 불과 75미터가 모자랄 뿐 서벽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2500m 높이의 거벽이다.
그동안 서벽은 세계의 첨예한 알피니스트들에게 외경의 대상이었다.
영국, 미국, 일본 등의 많은 산악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아 왔으나
미답의 벽으로 남아 있었다.
1985년에 보이테크 쿠르티카와 로버트 샤워가 이 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올라
초등을 기록한 이래 재등을 허용치 않던 벽이었으나
한국대가 신루트를 뚫고 재등에 성공하면서
세계 산악계는 한국대의 성공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놀라워했으나
일부의 백인들은 믿기지 않는 의외의 성과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 등반성과 또한 미국에서 발간하는 <클라이밍>지에 비아냥거리는 투의 기사가 실려
우리를 불쾌하게 했다.
미국의 산악 평론가 에드 더글라스는 이 잡지에 한국대의 성과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의 논평을 실었다.
“연중 눈이라곤 구경도 할 수 없는 열대의 작은 섬나라 자메이카의 봅슬레이 팀이
동계 올림픽에서 우승을 한 것과 같다”며,
“한국대의 성공은 뜻밖의 성과였다”는 투의 비아냥거리는 글을 실었다.
서양인들의 유색인종 깔보기 습성이 그대로 노출된 사례라 할 수 있다.
글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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