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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건강관리

by [대전]풀때기 201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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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건강관리

 

 

'서애 유성룡'이 정리한 `'퇴계 연보'를 보면

'퇴계 이황(1501~1570)'은 생전에 건강이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스무살 때인 1520년의 저서에는

“주역을 읽고 그 뜻을 연구하고 이해하느라 거의 자고 먹는 것을 잊다시피 했다.

이 때문에 몸이 쇠약해지고 마르는 병을 얻게 됐다.”고 기록돼 있다.

 

 

37세 때에는 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상중에 퇴계는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몸을 해쳐 다시 병을 얻게 됐다.

당시 퇴계의 건강상태에 대해 서애는 “거의 돌아가실 뻔했다”고 적었다.

 

 

 

연보에는 이밖에 퇴계가 병 때문에 관직을 사직했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보인다.

물론 옛사람들은 벼슬살이를 거절할 마땅한 사유가 없을 때에는

병을 핑계 하고 사직서를 올리는 게 관행처럼 돼 있어

사직의 원인이 꼭 병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연보에 ‘병으로 사직했다(病辭)’는 구절이 십 수 차례에 달한 것을 보면,

퇴계가 병치레를 자주 한 것은 상당부분 진실인 것 같다.

 

 

 

퇴계의 병력(病歷)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명종이 승하하던 해인 1567년,

다섯 째 형인 이징(李澄)에게 보낸 편지에는

“도성에 들어온 지 사흘만에 국상을 당했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는데,

한양에 올라오는 배에서 더윗병(暑痢)을 얻은 데다

위장병(脾胃症)마저 도져 음식은 생각지도 못할 정도입니다”라고

자신의 병세를 전하고 있다.

 

 

 

아들 준(寯)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옛 병이 도졌다.

연초에 아랫배에 창만증(脹滿症)이 걸렸는데,

여러 약을 써도 차도가 없다.

작은 병은 아닌 듯하다”라며

몸에서 병이 떠날 날이 없었음을 알게 해준다.

 

 

 

퇴계연구가 권오봉 전 포항공대 교수는

퇴계가 가족,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 937편 가운데

건강에 관한 사연을 쓴 것이 219편이나 된다고 밝히고 있다.

생애에서 건강이 중요한 관심사였다는 한 증거이다.

 

 

 

 

 

 

병치레가 많았던 만큼 퇴계는 건강관리에도 꽤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등산은 기본이었다.

오늘날에는 산에 가는 것을 ‘산에 오른다’는 의미로 ‘등산(登山)’이라고 하지만

선인들은 ‘산에서 노닌다’는 뜻으로 ‘유산(遊山)’이라고 불렀다.

 

 

 

퇴계가 자주 ‘유산’한 곳은 고향인 안동 가까이 있는 '청량산'이었다.

어쩌면 청량산과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청량산의 자락인 안동군 도산면 온혜동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의 짧은 벼슬생활을 제외하면 대부분을 청량산 인근에서 보냈다.

만년에 후학들을 가르쳤던 도산서원은 청량산과 20리 남짓 떨어져 있을 뿐이다.

퇴계가 청량산을 오르내리며 건강을 돌본 것은

지리적 여건상 너무 자연스런 일이다.

말년에 퇴계가 자신의 호를 ‘청량산인(淸凉山人)’라고 칭한 것은 이 때문이다.

 

 

 

 

 

풍기군수로 부임해서는 소백산에도 올랐다.

그때 나이가 49세였으니 소백산을 등산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3박4일간 산을 유람하며 마침내 1,440m 정상에까지 올랐다.

 ‘퇴계집’에는 당시 소백산 산행에 대한 감상을 기록한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이라는

수필이 실려 있다.

또 `단양팔경 이란 용어도 퇴계가 단양군수 시절 관내 경치좋은 곳을 유람하며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의 ‘유산벽(癖)’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평생을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매진한 퇴계가

자주 산에 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옛날 관리나 유학자가 산에 오르려면

여러 명의 종이나 제자들이 함께 동행해야 하는데다 시간도 적잖이 소요됐다.

요즘은 교통이 편리해 당일치기로 오르내릴 수 있는 산도

당시에는 3~4일은 족히 걸린 경우가 허다했다.

 

 

 

때문에 병약한 퇴계는 자신의 건강관리를 위해 별도의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퇴계가 공부하고 후학을 가르치고 난 여가에 혼자서 자주 애용했던 건강요법은

‘도인법(導引法)’과 ‘발바닥 문지르기’였다.

 

 

 

‘도인법’은 오늘날 요가와 비슷한 실내체조의 일종인데,

퇴계는 물론 후대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졌던 건강관리법이었던 것 같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둘째형 약전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제 육경(六經) 연구를 마쳤으니 도인법에 몰두하고 싶다”는 얘기가 나온다.

 

퇴계가 도인법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몸을 다스렸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도산서원에 소장돼 있는 ‘활인심방(活人心方)’의 친필유묵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활인심방’은 퇴계가 중국의 의학서를 베낀 것으로

여기에는 8폭의 도인도(導引圖)가 소개돼 있다.

도인도의 내용에는 앉은 자세에서 팔 위로 들어올리기, 목과 어깨 좌우로 돌리기,

단전호흡, 윗니 아랫니 딱딱 마주치기, 두 손 깍지끼고 추켜올리기 등

다양한 자세가 소개돼 있다.

 

 

 

‘도인법’이 중국 의서에서 유래한 건강관리법이라면

‘발바닥 문지르기’는 민간요법이라 할 수 있다.

퇴계는 넷째 형 이해(李瀣)가 몸에 열이 많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보고

‘용천혈 마찰법’을 권했다.

용천혈(湧天穴)이란 발바닥의 앞쪽 가운데 부분으로,

이곳을 손으로 비벼주면 질병 치료,

특히 열을 가라앉히는 데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퇴계는 용천혈 마찰법, 즉 발바닥 문지르기를 건강비법으로 넷째 형 이외에도

그의 문인들과 아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곤 했다.

민응경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저는 심화병(心火病)이 나면 용천혈 마찰법을 씁니다.

온몸에 땀이 날 정도로 문지르면 바로 병이 나아집니다”라며

한번 시험해 볼 것을 권했다.

 

 

 

 

퇴계는 건강체질은 아니었다.

아니 타고난 허약체질이었다.

그의 편지글에는 소화불량, 안질, 심화증, 비위증, 창만증과 같은 수많은 병명이 보인다.

이렇게 많은 병을 앓고도 고희(古稀)의 삶을 살았다는 게 불가사의할 정도다.

그러나 자신의 병약함을 잘 알았기에 퇴계는 건강관리에 만전을 기했다.

퇴계가 한국 철학의 큰 봉우리로 우뚝 서게 된 데에는

등산, 도인법, 발바닥 문지르기 같은 건강관리법이

밑받침이 됐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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